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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꾸미의 이 숨막힐 듯한 자태를

모전자전 ‘큰손’의 해물두부전골
등록 2013-11-23 15:34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손이 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음식과 관련해서 그렇다. 후배들에게 밥을 사거나 집에서 음식을 해먹을 때도 일단 푸짐하게, 라는 기조다. 그렇다. 손이 문제다. 내 잘못이 아니다.

결혼한 뒤 종종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다. 거의 매번 양 조절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닮아 이렇게 손이 클까.” 당신 시어머니 닮아 그렇네. 어린 시절 어머니는 김치찌개를 곰솥으로 끓이셨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흡사 화수분이었다. 어쨌든 핏줄은 속일 수 없다. 에라, 모르겠다. 간만에 ‘손의 봉인’을 풀기로 했다. 날도 으슬으슬한데 뜨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보자. 전골, 오늘은 너로 정했다.

장을 보러 갔다. 냉장 포장된 주꾸미가 눈에 들어왔다.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는데 너희는 여기서 무얼 하니? 그래도 상태는 좋아 보였다. 봉지굴과 바지락, 다른 재료들도 챙겼다. 다시마와 멸치, 대파로 육수를 뽑는 동안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전골용이 아닌, 커다란 냄비를 꺼내들었다. 양파 반개를 대충 썰어 바닥에 깔고, 그 위를 숙주로 덮었다. 벌써 냄비 절반이 찼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배추, 팽이와 느타리버섯, 그래도 고기가 빠지면 섭섭하니까 국거리용 한우 사태도 150g쯤 넣었다. 바지락과 굴도 들어갔다. 여기까지였다. 아직 들어가야 할 재료들이 산더미인데, 더 이상 공간이 없었다.

모처럼 ‘폭주’를 각오한 이상, 물러설 순 없었다. 바닥에 깔린 숙주를 절반쯤 덜어냈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 두부 반모와 애호박 반개를 썰어 넣고, 굵은 소금을 박박 문질러 손질한 주꾸미 4마리와 쑥갓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표고버섯과 칼칼한 국물맛을 위해 송송 썬 고추를 올렸다. 아직 육수를 붓기 전이었다. 뿌듯했다. 보라, 이 숨막힐 듯한 자태를. 대충 6인분쯤 돼 보였다. 또 한소리 듣겠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맑은 육수를 자박자박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주꾸미 먹물이 퍼져나갔다. 어느 정도 끓인 뒤 불을 줄이고 국물을 한 모금 맛봤다. 말 그대로 입안에서 맛의 폭탄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열광했다. “도대체 뭘 넣었길래 이런 맛이 나지?” 양념은 다진 마늘 약간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간은 아예 안 했다. 소금기라고는 육수에 들어간 멸치 몇 마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국물 맛이 기가 막혔다.

소주 한 잔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을 열어뒀는데도, 온몸이 뜨끈뜨끈해지며 땀이 났다. 화수분이라고 믿었던 냄비는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밥도 알차게 한 그릇씩 비웠다. 세상에, 우리가 정녕 이 전골을 다 먹어치웠단 말이오. 배가 불러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누가 먹었지? 손이 먹었다. 내 잘못이 아니다.

송호균 사회부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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