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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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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 점의 수육 되리라

출장 떠날 아내를 위한 ‘돼지수육’
등록 2013-05-05 14:48 수정 2020-05-03 04:27

무려 일주일이 넘게 해외 출장을 떠날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기로 했다. 아이가 여름캠프를 가면 ‘와우’, 아내와 아이가 함께 떠나면 나 홀로 ‘올레’라고 했던가.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많은 건 그래서일 터. 곰곰이 생각해봤다. 물론 간만에 친구를 불러내 술 한잔 할 수도, 아직 미혼인 동창들과 짧은 주말여행을 기획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뭐 ‘올레’일 정도로 좋은 일인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내의 부재를 못 견뎌하는 쪽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좋아죽겠다”고 하기엔 뭔가 거창한 일탈을 감행할 깜냥이 못 되고, “널 보내지 않을 테야”라는 식의 신파로는 부부의 손발이 함께 오그라들고 말겠지. 매년 비슷한 시기에 출장을 떠나는 아내와 결혼한 뒤 결국 그럴듯한 대답을 생각해냈다. “자네, 갑자기 홀아비 신세가 됐군?” 네,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여보, 혼자 심심하지 않겠어요?” 응, 견딜 만해.
아내의 출장은 견딜 만했지만 메뉴는 고민이었다. 어쨌든 한식이 좋겠지. 곧 죽어도 “고기!”를 외치는 그녀를 위해 간만에 돼지고기 수육을 하기로 했다. 퇴근길에 삼겹살 한 근을 끊었다. 각종 쌈채소가 싱싱해 보였다. 흙 묻은 냉이도 한 줌 챙겼다. 고기를 삶는 과정은 곧 잡내와의 투쟁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깃덩이를 찬물에 담가 잠시 핏물을 빼는 사이에 밥을 안치고, 물을 끓였다. 팔팔 끓는 냄비 안에 양파와 파를 뿌리째 던져넣었다. 된장을 한 숟갈 풀고, 통후추 몇 알과 먹다 남은 소주를 적당히 넣어줬다. 이제 삼겹살을 냄비에 넣고 40분 동안 삶으면 기본적으로 수육은 완성이다.

한겨레 송호균 기자

한겨레 송호균 기자

기다리는 사이에 상을 차렸다. 쌈채소를 씻고, 풋고추와 마늘, 쌈장을 준비했다. 냉이를 다듬어 된장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다시마와 멸치로 국물을 내고, 애호박과 두부는 큼지막하게 깍둑썰기했다. 뚝배기에 냉이가 들어가자 부엌 가득 봄내음이 퍼졌다. 냉동실을 뒤지니 잠자고 있던 대하 몇 마리가 나왔다. 망설임 없이 된장찌개에 넣었다. 팔팔 끓는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한 모금 맛봤다. 봄바다 맛이 났다.

가지런히 수육을 썰고, 어머니표 겉절이와 장모님표 김장김치를 한 접시에 담아냈다. 잘 삶은 부드러운 돼지고기는 어느 쪽 김치와 함께 먹어도 기막히게 맛있었다. 이건 어쩌면 ‘시월드’와 ‘처월드’의 매우 바람직한 조우랄까. 수육 같은 남편·사위·아들이 되리라, 기특한 생각과 함께 입안 가득 수육을 밀어넣었다. 반주가 빠질 수 없지. 부부가 함께 막걸리를 부었다. 과음이었을까. 결국 아내의 출국 직후 감기몸살에 걸려 일주일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아, 물론 견딜 만하긴 했지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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