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아람(주) 제공
절대 적에게 들키기 싫은 표정들이 있다. 예를 들면, 겁먹은 표정이다. 그건 얕잡힐 빌미를 스스로 쟁반에 담아 바치는 꼴이다. 이보다 더 들키기 싫은 것은, 내가 겁먹었다는 것을 감추려고 애써 지었지만 결국 나의 겁먹음은 물론 그것을 덮으려는 애잔한 노력까지 드러날 때의 표정이다.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 짓게 되는 표정 역시 굴욕적이다. 내가 잠시나마 참으로 순진했다는 것을, 분명히 너보다 하수였다는 것을 자백하는 항복 선언인 셈이라 자존심의 가장 연약한 부분까지 털리고 마는 것이다.
영화 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표정들을, 가장 아름다운 표정부터 가장 모멸적인 표정까지 한데 보여주는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 모음집 같다.
이제야말로 내가 세상을 좀 안다고, 나도 이제 딜 좀 하고 산다고 믿으며 자신 있게 내놓은 패가 상대방 앞에선 비웃음거리도 못 됨을 깨달았을 때, 10년을 바쳐 노력해온 일이 실은 아무 가치도 없었음을 인정하게 됐을 때, 유일하게 신뢰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하필이면 내 적수 앞에서 확인받게 됐을 때, 그리고 상대는 압도적으로 강해서 우리가 사실은 다 같은 인간이 아니고 나는 그저 다리 많은 벌레에 지나지 않음을 시인하게 됐을 때, 인간은 각각 어떤 표정을 지을까. 충격과 수치심에 그간 힘들게 유지하던 여유가 무너지면서 온몸의 피가 일순 뺨으로 몰리는 순간을 적에게 들키는 비참함. 가능할 리가 없는데도 창수 스스로는 복수와 반전의 가능성을 믿기 시작할 때만큼이나 스크린을 쳐다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결국 빛나는 것은 창수가 짓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표정들 때문이다. 그는 구원의 여지라고는 안 보이는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낙천적이고 즉각적으로 희망을 믿는다. 여자가 그런 끔찍한 말로를 맞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자기랑 정착해 살 리는 없었다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창수 본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진심 어린 키스를 받고 자기 입술을 만질 때 그의 표정은, 잘못 배달된 선물인 줄도 모른 채 너무나 좋아서 이것은 내 것일 리 없다는 상식적 의심도 못 가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환희로 천진하게 행복하다. 그다음에 다가올 인생의 굴곡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도 않은 채. 그것은 다시, 이후에 닥칠 고통을 돌파하고 견디는 힘이 된다. 하기는, 실패할 때조차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일 리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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