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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이어라, 기계의 은총이여

베틀 키트화의 당찬 포부
등록 2013-11-16 13:28 수정 2020-05-03 04:27
최빛나 제공

최빛나 제공

지난번에 이어 베틀 이야기를 한 번 더 해볼까 한다. 양털폭탄 연구실을 가동하며 만들어낸 3가지의 베틀을 가만 보고 있자니 흠, 3가지라… 숫자도 좋고 이거 키트(kit)로 만들어봐야겠다 싶어진다. 지금의 제작 문화에서 선진의 유행이라면 바로 키트화 아니겠는가. 실제 ‘킥스타터’ 같은 소셜 펀딩 사이트에선 제품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이 올리는 시제품 키트들을 거의 매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공해 ‘밀리언달러 베이비’ 호칭을 받는 제작자가 생기는 일도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현상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 앤더슨 풍의 ‘제조업 혁명’ 담론이 이곳에서도 먹히는 것일 테고, 행정가들의 가방에 ‘메이커스’ 책이 창조경제의 레퍼런스로 들어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레퍼런스부터 존재한다는 것이 늘 이곳의 불행이다. 메이커 스페이스를 만들겠다는 분들, 맥락 없이 3D 프린터부터 떠올리는 건 상상력 이전의 문제. 어쩔.)

어쨌든 ‘상품화나 제품화가 아닌 다른 키트화를 해보겠다’ 뭐 이런 소리까지 해가며 레이저 커팅을 위한 베틀 도면을 디자인했던 거 같다. 서울 홍익대 인근에 위치한 레이저 공방 사이트에 도면을 업로드하고 커팅 과정을 구경하러 갔다. 오오오오! 이런 호쾌한 기계를 봤나! 레이저가 MDF 표면을 가르며 불꽃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빠른 속도로 도면 그대로를 오려낸다. 30여 분 만에 3세트의 베틀(사진)을 만들어낸다. 온갖 잡다한 재료를 늘어놓고 며칠째 드릴로 구멍을 뚫어가며, 본드로 붙여가며, 물에 넣고 끓여가며, 톱으로 잘라가며, 못질해가며 만들었던 그 모든 노동은 무어라 말인가, 라며 땅을 치는 얘기로 옮겨간다면 그건 뻔한 신파. 그럴 리가.

DIY, 호모파베르, 손을 움직이는 기쁨 유의 시그널을 보내거나 그런 멘트를 선보인 적이 없음에도 어느새 우리의 활동이 그런 맥락 안에서 수공예에 애착하는 그룹으로 이해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사실 우리는 ‘기계의 은총’을 무척 반기며 인터넷 사물과 온갖 비인간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레이저 커팅이 일으키는 기예의 불꽃이 어찌 매혹적이지 않으리. 하지만 여기까지. 그렇다고 이 3천만원짜리 레이저 커팅기에서 뽑아져나온 베틀을 지금의 제작문화의 맥락에 붙여놓고 ‘데스크톱 제조‘ 어쩌고 ‘동료 생산’ 저쩌고 하는 것도 몸이 꼬인다.

한번 커팅을 해보니 이것저것 고칠 부분이 계속 눈에 들어와 ‘방망이 깎는 노인’ 모드로 도면을 세밀하게 다듬고 있다. ‘이 부분은 손에 잡히는 부분이니 좀더 둥글어져야겠지?’ ‘이 부분은 실을 빼야 하는 부분이니 타원형이 좋겠지?’ 알아채지도 못할 깨알 같은 수치를 조절하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가만! 이거 처음부터 노트북 켜고 도면부터 만들고 앉았으면 이렇게 만들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프트웨어상에서 0.1mm의 수치를 조작하며 도면을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제어하는 감각이 무엇이지? 가만히 더듬어보니 그것은 수작업 과정에서 경험한 온갖 촉각적 데이터들이 아닌가. ‘이봐요, 창조는 이렇게 나오는 거라니까요!’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뭘, 창조는 이렇게도 나오고 저렇게도 나오는 거지.

어쨌건 여러 번의 작업 끝에 흡족할 만한 도면을 만들어냈다. 베틀 도면을 원하시는 분은 곧 오픈소스로 공유할 것이니 내려받으시길. 이념이 조락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오픈소스란 지대가 있네. 이리로 피하시게!

최빛나 청개구리제작소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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