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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진(Zine)!

다른 출간의 방식을 상상하며
등록 2014-08-30 15:11 수정 2020-05-03 04:27
최빛나 제공

최빛나 제공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정보기술(IT)의 블랙박스 같은 알고리즘, 그것과 연동되는 피부 같은 미디어, 그것들 간의 매시업(융합) 속에서 변화하는 노동과 시장. 그 앞에서 서서히 해체되는 것들은 자신이 어떻게, 왜 해체되고 있는지 알까? 그 해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 청년기에 나의 지식이 낡아짐을 확인하는 그 속도는 어떻게 할까? 걸어갈 수 없다. 이동하는 땅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 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어떤 의미로든 ‘자기계발’ 덫에 사로잡힌다.

본업이 디자이너다보니 편집디자인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는데 이제는 책을 만들기가 싫다. 여전히 가장 훌륭한 미디어로 경외하지만 이제 주요한 지식의 유통은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커지면서 더욱 하기가 싫어진다. 영 변하지 않는 출판 시스템도 지긋지긋하다. DTP(Desktop Publishing) 혁명이라 불리는 ‘전자편집 시스템’의 은총을 받으며 디자인을 시작했건만 기술적 진보와 별개로 어딘가에서 턱 막혀 있는 출간 양식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새로운 미디어를 고안해보고, 저자적인 포텐을 폭발시켜 다양한 출간 방식을 실험하려고 ‘진 스프린트’(Zine Sprint)라는 프로그램을 가동해봤다. 진(Zine), 쉽게 얘기하면 로테크로 만드는 자가 출판물을 가리킨다. 책자·팸플릿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CD, 포스터, 스티커,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까지 폭넓은 미디어를 ‘진’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 스프린트는 ‘자가 출간물을 단거리 질주하듯 만들어보자!’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미디어 아티스트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부터 활동가, 커뮤니티 공간 운영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여들었다. 서랍에 글을 새긴 책상-책, 담벼락에 시멘트로 슬쩍 고정해둔 USB(지나가는 사람이 노트북에 꽂으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야동이 채워졌다나 ㅡ.ㅡ), 구글 독스를 이용해 온갖 비문과 오타를 제보받고 그걸 트위터로 퍼트리는 ‘월간 언어도단’(읽어보길. 저자는 허르만 허세라는 시인이다), 테이프처럼 만들어 어디든 붙일 수 있는 책까지, 흥미로운 사례가 여름밤 옥상에서 발표됐다.

“아이들 손에서 어떻게 스마트폰을 빼앗겠어요? 아이들은 이제 그림책이 아니라 터치패드를 선택해요. 그러면 그걸 이해하기 위해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림책 앱과 피겨어 로봇을 이용하는 출판 방식을 만들고 싶다는 한 참여자의 이야기에 20년 공력의 그림책 작가가 반색한다. 지금 출간시장의 문제는 치열한 작가 정신과 내용적 소통에 대한 고민으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출간의 미디어와 과정, 감각과 개입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 그럼 나는 새로운 출간을 위해 뭘 만드냐고? 등사기를 만들어볼까 한다. 철필로 가리방을 긁어 잉크로 밀던 그 등사기? 맞다. 구시대적 도구를 왜 만드냐고? 글쎄, 나도 만들어봐야 알 거 같다. 다음 글에는 그 삽질을 써볼 수 있길 기대한다.

최빛나 청개구리제작소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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