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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소리 통랑하게 들리네

월동 준비 ① 김장배추·깨·고구마 가을걷이… 삶의 준엄함은 다를지라도 어머니나 나나 겨울 준비의 핵심은 결국 먹을 것·데울 것
등록 2013-11-16 13:19 수정 2020-05-03 04:27
수확한 고구마 앞에서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 이준숙.강명구 제공

수확한 고구마 앞에서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 이준숙.강명구 제공

조석으로 한기가 돌고 뒷산의 나무들이 울긋불긋해지면 누군가 겨울 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청설모가 잣을, 그리고 다람쥐가 산밤을 모아 쟁이기 시작하면 나는 뒷산에 잠들고 계신 어머니가 나에게 뭐라고 이르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남부여대(男負女戴)는 아니지만, ‘도락꾸’(트럭)에 장독까지 싣고 양수리를 거룻배 페리로 건넌 뒤 망우리 고개를 넘어 산비탈 ‘하꼬방’촌에서 한 가족이 서울서 처음으로 맞은 겨울은 매서웠다. 이때의 추억 때문인지 살림이 좀 피고 나서도 어머니의 겨울 준비는 꼭 같았다. 마치 서바이벌 게임하듯이 생존에 필수적인 단출함 그 자체였다. 우선 짜고 맵게 김장을 담그고, 그다음으로 쌀과 연탄을 준비하면 끝이었다. 물론 김장의 부산물인 무청 시래기를 넣은 뼛국과 무말랭이 같은 호사도 가끔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나의 생활은 아방궁까지는 아닐지라도 호화로움 그 자체다. 하나 아무리 그럴지라도 보일러 온도 스위치와 마트의 배달 전화번호로 겨울 채비를 하는 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 내가 지금 사는 이곳은 산 너머가 바로 커다란 호수라 겨울 추위가 영하 20℃까지 자주 내려간다. 나의 어머니가 그러하셨듯, 이곳에 정착한 첫해에 눈도 많고 추위도 매서웠다. 그 고생한 기억이 나의 겨울 준비 교습서 역할을 했다. 이곳으로 이주한 첫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가 통학버스에서 내려 무릎까지 오는 눈길을 눈물·콧물로 헤매는 것을 보고 마련한 중고 사륜구동 지프차가 벌써 14살이니 나도 제법 겨울맞이 구력이 붙은 셈이다.

겨울맞이 하며 어머니가 대면하셨던 삶의 준엄함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나의 겨울맞이 또한 형식에선 그다지 다르지 않다. 세월이 좋아져 탈것(자동차)에 대한 대비가 좀 다르다면 다를까 결국은 먹을 것과 데울 것에 대한 준비가 겨울 준비의 핵심이다. 쌀이나 보리 같은 주곡은 아직 능력 밖이지만 벌써 10년 넘게 김장 준비며 채소 갈무리며 고구마 등속 겨울 군것질거리 준비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자글자글한 가을볕에 말린 고추를 떡방앗간에서 빻아 읍내 시장에 있는 10년 단골 형제수산 사장님이 추천해준 젓갈과 생새우로 버무려 담근 김치 50여 포기는 겨우내 일등 찬거리며, 내 집을 방문하는 제자들 가족이 삼겹살 구울 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김장이 주로 아내의 영역이고 내가 보조라면 그 밖의 가을걷이 노동은 주로 큰아이 몫이다. 출근 전이나 퇴근 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깻단을 베어놓고 풍성한 고구마 줄기를 밭 한쪽으로 밀어붙여 놓으면 주말에 집에 들른 큰아이가 멀찍이서 뽈 때 한 폭의 풍경화처럼 가을걷이를 한다. 짙푸른 비닐 멍석을 깔고 그 곁에 수북하니 마른 깻단을 쌓아놓고 하나씩 가져다 작대기로 매질을 해대면 고소한 깨 내음이 진동을 한다. 마나님 자문에 의하자면 이렇게 해서 마련한 들깨는 갈아서 겨우 내내 배춧국·토란국·미역국도 끓이고 묵나물 데쳐먹고 볶아먹을 때 요긴한 양념이 되고 껍질을 까서 가루로 내면 훌륭한 샐러드드레싱의 재료가 된다.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은 재미 반 푸념 반이다. 감자 캐기와 달리 고구마 캐기는 의외로 고난도 작업이다. 주먹처럼 큼직한 녀석들은 캐기가 식은 죽 먹기지만 20~30cm 땅 아래에 곧추 뿌리를 박은 긴 녀석들은 제대로 캐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캐다가 중간에 부러지면 호미자루를 내던지며 여기저기서 식 감탄사인 “아, ×바” 소리가 통랑하게 들리기 일쑤다. 하여간 이렇게 마련한 고구마는 부엌 옆의 보일러실에서 겨울을 나며 난로 속에서 군고구마가 되기도 하고 내 점심 도시락이 되기도 한다. 콩은 거의 매년 수확에 실패해 아직 제대로 메주 띄우고 장 담그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아무려나 우리 가족의 가을은 이렇게 깊어가고 겨울은 저만치서 오고 있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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