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0호에서 계속) 아마 이맘때였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개아범 (920호 ‘팔선녀의 지령과 주폭마누라’ 참조)의 명륜동 자취방에서 우린, 뭐 재밌는 일이 없냐고 뒹굴거리고 있었다. 개아범이 갑자기 말했다. “심비홍 골려먹자!” 녀석은 곧바로 쪽대본 개시나리오를 짰다. 당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화 연출 강의를 듣던 개아범. 같은 반 여학생 3명과 술을 먹기로 했는데 남자가 하나 부족하다며 심비홍을 부르자는 것. 아주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를 해라~.
그러나 난 반신반의했다. 평택에 있는 심비홍이 이 말만 듣고 서울까지 올라올까. 개아범은 자기만 믿으라며 냅다 심비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연출이 아니라 연기 배우니? 심비홍은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밤새워 알바하고 아침에 신갈까지 가서 운전면허 시험을 봤다고 했다. 개아범은 “그럼 안 되겠네~. 좋은 건수 생겨서 전화했더니만” 이라고 말을 흘렸다. 첫 번째 미끼였다. “왜? 뭔데?” 심비홍은 즉각 반응했다. 단순한 놈. “아니, 저번에 얘기한 센터 여자애들이랑 술 한 잔 먹으려고 배추벌레(X기자 별명) 불렀는데 너도 오라고 그러려고 그랬지~.” 심비홍은 처음에는 피곤하다며 못 간다고 뻐팅겼다. 개아범은 “그래~ 그럼, 애들 장난 아닌데 안됐다”라고 말을 하며 일부러 전화를 끊는 시늉을 했다. 이에 심비홍은 언제 만날 거냐며 아쉬움
을 감추지 못했다. 개아범은 지금 커피숍에서 여자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개구라’를 쳤다. 난 카세트를 들고 볼륨을 높인 채 움직이며 커피숍 배경음을 깔았다(심비홍은 여기에 완전 속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심비홍은 아, 피곤한데~ 하면서도 기차 시간 알아보고 연락한다고 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쾌재를 불렀다. 30분이 지났을까. 이 인간이 우릴 속인 거 아냐? 슬슬 불안해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지금 기차 타고 올라오고 있어.” 그럼 그렇지~.
근데 막상 심비홍이 올라온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이 인간이 우리가 뻥친 거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개아범이 어디론가 전활 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곱창녀였다. 대학로에서 곱창 모양의 여자 머리 끈을 팔던 또래 아가씨였다. 개아범은 자신에게 호감이 있던 곱창녀를 대학로 이화주막 앞으로 호출했다. 우린 녀석에게 장소를 일러준 뒤 개실망할 심비홍의 얼굴을 상상하며 털레털레 대학로로 향했다. 술집 앞에 가보니 곱창녀와 심비홍이 서로 뻘쭘하게 서 있었다. 개 아범은 그 둘을 소개시켰다. 갖은 멋을 부리고 올라온 심비홍은 우릴 죽일 듯이 노려봤다. 우린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랬지~”라며 애교를 부렸다. 심비홍은 “다른 날은 모르지만 오늘만은 니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날”이었다며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러게 누가 올라오라고 그랬냐?
그날 심비홍은 정신줄을 놓고 술을 마신 뒤 노래방 마이크 줄로 개아범의 목을 졸랐고, 노래방 문을 걷어차 지나가는 노래방 아저씨를 공중부양시켰으며, 노래방 앞에서 오줌을 싸 노래방 아주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 개시나리오가 부른 개판오분전이었다는 얘기로 리버힐즈의 밤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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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