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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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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관문을 열다가 만 깜보

텐트 설치돼 있어 편한 서울대공원자연캠프장 ②
등록 2013-04-26 20:12 수정 2020-05-03 04:27

(956호에서 계속) 마감을 마치고 새벽녘에 기어들어와 보니, 와잎이 아들 녀석을 껴안고 떡실신해 있다. 술냄새 쩐다~. 맥주로 가글했니? 벽 보고 자면 안 되겠니? 쌀은 떨어져도 술은 안 떨어진다더니~ 술은 또 언제 사다 먹은 거니? 주류 도매상에서 배달받아 먹니? 술냄새에 취해 아들 녀석은 늦잠을 잤다. 잘했군 잘했어~ 우리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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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캠핑 타령을 했다. 전날 엄마한테 캠핑 간다는 얘길 들은 터였다. ‘엄마, 어디 가?’ 콘셉트로 둘이 가면 안 되겠니~라고 괴로워하는데 와잎이 말했다. “어디 국물 좀 없나?” 작작 마셔라~ 그러다가 진짜 국물도 없는 줄 알아~. 가는 길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경기도 과천으로 들어섰다. 주말 서울대공원 방문 차량으로 정체가 심했다. 주차를 한 뒤 짐을 들고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언제 도착해?x100’을 한 아들 녀석이 와잎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과천에 있는데 왜 서울대공원이야?” 와잎이 말했다. “니 아빠한테 물어봐. 그런데 원래 감자탕에 감자 없고, 붕어빵에 붕어 없고, 좌석버스에 좌석 없고, 서울에 서울대공원 없는 거야~.” 아직도 술이 안 깼니? 좀 봐라. 865호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답이 있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아들 녀석이 말한다. “다 왔다~.” “….”

텐트를 예약했어도 별도인 입장료(어른 2천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천원, 6살 미만·65살 이상 무료)를 내고 배정받은 텐트에 짐을 풀었다. 시설은 깔끔한 편. 1시간쯤 뒤 깜보가 처자식과 함께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머리가 더 훤칠했다. 구릿빛 호남형 외모에 흑인의 운동신경으로 지역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깜보는 간데없고 민머리 서 부장님이 서 계셨다.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부장의 아버님은 예비군 동대장님. 중2 점심시간 막 도시락을 먹으려던 순간, 뒷문이 열리며 군복에 베레모, 라이방을 쓴 군인 아저씨가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은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흘렀고, 그 군인 아저씨는 “××아, 밥 먹어라~”며 깜보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웃으며 사라졌다. 콩트 같았던 그날 이후 깜보의 아버님은 우리의 놀림거리가 되었다(참 철도 없지~). 고등학교 때까지 종종 예의 그 군복 스타일로 도시락 배달을 해주셨던 깜보의 아버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단다.

탈모가 고민이라는 부장님의 하소연을 한 귀로 흘리며 우린 저녁 준비를 했다. 난 각종 쌈채소를 씻고 밥상을 차렸다. 부장님은 화로에 오스트레일리아산 쇠고기를 구웠다. 아이들은 지들끼리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잎은 결국 모든 것이 혈액순환 때문이라며 소맥을 말았다. 너 참 피 잘 돌아서 좋겠다~. 부장님은 무방비 상태로 폭탄을 받았다. 지금 니 얘기 하는 거야, 부장님아~. 머리까지 빨개져서 정신 못 차리는 부장님을 위해 집에서 가져온 명약주를 꺼냈다. 귀농한 넷째 매형이 담가서 건네준 ‘야관문’ 효소였다. ‘밤의 관문을 열어준다’는 의미의 야관문은 산기슭에서 자라는 흔한 야생초. 효소 원액에 소주를 희석해 부장님에게 진상했다. 녀석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받아먹었다. 그날 깜보는 밤의 관문을 열기만 하고 닫지는 못한 채 자시경에 뻗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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