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다.”
1825년 을 써서 미식문화의 원류가 된 프랑스인 브리야사바랭은 그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빗대 말할 수 있겠다. “당신이 오늘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날 것이다.” 지금 세상엔 다양한 음식만큼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숫자도 헤아리기 어려운 케이블방송, 그 방송에서 나오는 숱한 프로그램, 노동을 마친 노곤한 저녁에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나, 멍하니 멈추고 보는 프로그램에서 남모를 즐거움을 발견하는 경우도 적잖다. 그렇게 홀로인 시간, 다른 이와 채널을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 즐기는 프로그램은 ‘진짜 나는 누구인가’를 조금 설명해주기도 한다. 나도 몰랐던 나의 취향, 남들에게 대놓고 추천하긴 어려워도 가까운 이들에겐 ‘이거 괜찮아’ 넌지시 말하게 되는 프로그램 한둘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출발했다. 지상파 방송의 10~20% 시청률이 보는 사람을 집단으로 나누는 근거가 된다면, 케이블방송의 1~2% 시청률은 집단으로 분류되지 않는 나만의 취향, 나만의 ‘길티플레저’(죄책감을 느끼면서 즐기는 것)를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기대에서 텔레비전 좀 본다는 ‘여러분’, 태돌이·태순이 등에게 물어봤다. “혼자서 뭐 보세요?”
형제인 김선 감독과 함께 매우 반자본주의적이고 아주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김곡 감독은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축구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영화에 폭력이 나와도 결코 폭력을 조장하는 맥락에서 쓰지 않는 감독이 가끔 넋 놓고 보는 프로그램은 ‘피 튀기는’ 이종격투기 UFC 경기다. 결코 UFC 마니아는 아니라는 그는 “극한까지 밀어붙여 서로 뇌를 흔드는 게임인데, ‘아니 사람을 왜 때려’ 하면서 보게 된다”고 말한다. 어느새 “어, 어 기술 걸린다” 하며 ‘중계’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말이다. 원래는 이것이 그의 이면이라 생각했는데, 정리하고 보니 그가 만드는 영화의 남다른 경향과 통하는 면도 있다. 이런 그의 취향은 “다큐멘터리 채널의 희귀 곤충을 다룬 프로그램도 좋아한다”는 말로 이어진다.
남성중심주의 사회를 비판해왔지만, 용솟음치는 남성성에 잠시 자리를 내주는 시간도 있다. 이름도 낯선 총기류 관련 프로그램 이름을 대면서 “총기 허용에 반대하지만, 총기류 프로그램은 즐겨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케이블이나 종합편성채널(종편)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뭐가 있느냐고 묻자 “tvN에서 방송된 ”이라고 답하며 캐릭터의 새로움을 칭찬했던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길티플레저’를 집요하게 캐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 예전에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어느 방송에서 가슴이 강조된 캐릭터 옷 같은 유니폼을 입고 나와 앉아 있는 여성이 있었다. 아무 역할도 없는데 그냥 앉아 있어서, 왜 저러고 있나 했는데, 계속 보게 되더라. 아, 이유가 있구나 했다. 이탈리아에서 코믹한 뉴스 프로그램에 글래머러스한 여성이 남성 진행자 옆에 앉아 있었더니 시청률이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이해됐다.” 그 여성은 나중에 QTV에서 을 진행한 강예빈이 되었다.
어쩌면 당신처럼, 가끔은 홈쇼핑의 마력에 빠지는 이도 있다. 기성 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글에 담아온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길티플레저’의 하나로 홈쇼핑 시청을 꼽았다. “낮에 텔레비전을 트는 라이프스타일이면, 엄청난 자의식과 극강의 자기 세계가 있지 않는 한, 홈쇼핑도 보게 되고 물건도 사게 된다. 텔레비전이 사람들의 한가한, 눈먼 시간을 참 잘도 알아서 그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30분 정도 넋 놓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이랄까 영혼이랄까 하는 것을 빼놓는다.” 그는 “홈쇼핑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텔레비전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어서 거기에 내가 응하면 택배가 온다. 공중파가 창문을 통해 어떤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홈쇼핑은 세계와 내가 물적 교환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넋 놓고 있는 시간’에 무방비 자의식을 침입해 오는 여성들의 은밀한 취미, 남성들의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촌스럽지만 이상하고 황당한 재미
종편에서는 끝없이 연예인이 나와 외도와 돈 문제 등을 떠들어댄다. 황진미 평론가는 “근데 이것도 보다보면 웃긴다”며 “그 안에 나름 삶의 진실이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디테일에서 의미를 찾거나 프로그램이 의도한 바를 재해석해서 즐기는 ‘거꾸로 보기’도 있다. 허지웅 문화평론가는 채널A의 에서 묘한 재미를 찾는다. “미안하지만, 바보같이 진지해서 재미있다. 자기들의 취재 방식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서 국민 건강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보이는데, 이것이 촌스럽지만 이상한 재미도 있다.” 이승한 방송평론가도 “영국판 를 한국 케이블 채널에서 수입해 보여주는데, 민망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bbc>에서 만든 는 자동차에 대한 프로그램인데, 자동차에 관심이 있어서일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자동차보다 사람들의 기행이 재미있다. 이를테면 미국 남부 특집을 하는데,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를 지나가며 ‘차에 자극적인 문구를 써서 총을 맞거나 비난을 받으면 이기는 미션’을 준다. 이런 것도 있다. 차에 치여 ‘로드킬’ 당한 동물로만 그날 끼니를 때우라는 미션이다. 다른 이들은 다람쥐니 뭐니 찾고 있는데, 한 출연자가 ‘내가 제대로 된 걸 구해올게’ 하고 간다. 잠시 뒤 그가 죽은 소를 차에 싣고 저 멀리 지평선에서 오는데… 이런 황당함이 있다.”
이렇게 마음대로 해석하기는 마이너리티의 남모를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커밍아웃한 남성 동성애자, 김조광수 영화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을 열심히 봤는데, 사람들은 ‘게이가 남자도 안 나오는데 왜 보냐’고 묻는다. 그런데 원래 게이들은 여성의 감수성을 이성애자 남자보다 잘 이해한다. 더구나 그녀들이 남성에게 어떻게 어필하려는지도 공감하고.” 이들에겐 남들은 못 보는 맥락도 보인다. 김조광수 감독은 “케이블 프로에서 게이라고 정확하게 얘기는 안 하지만 남성 출연자가 자신이 어떤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지 말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고 전한다. 다른 게이 시청자는 “한국에서 남성 동성애자 이미지는 케이블을 타고 안방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패션·메이크업·헤어 프로그램에 은근히 남성 동성애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굳이 밝히지도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상파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런 캐릭터를 케이블은 필요에 따라 받아들인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듯이 재미도 디테일에 있다. 프로그램 전체보다는 부분에서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둑만화 을 그린 윤태호 작가는 바둑 프로그램을 보다 낄낄거리는 경우가 있다. 프로기사들의 긴장감 넘치는 승부가 아니라 나이 지긋한 아마추어가 여성 프로기사와 대결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다. “여기에 나오는 아마추어들도 아마 몇 단씩 되는 고수들인데, 프로기사와 대국하면서 조바심 나고 긴장되니까 예의를 벗어난 행동을 자주 한다. 바둑알을 짤그락댄다든지, 바둑판 위에 손을 올린다든지 하는 초보적인 실수다. 이런 행동에 여성 기사들이 당황하는 표정도 지으니까, 이런 우연성이 재미있어 보게 된다.” 그는 홈스토리 채널의 도 즐기는데, “허름한 집의 인테리어를 고쳐줘서 집을 비싸게 팔게 해주는 프로그램인데, 수리가 일주일 만에 끝나는 것이 내가 하는 마감 노동과 같은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때로 누군가의 취향에서 직업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추리물의 열혈팬이다. 판사로 시작해 변호사로 일하는 그는 “약속이 없는 날은 퇴근 뒤 저녁 7시, 쿠션을 베고 누워 캐나다 토론토를 배경으로 하는 형사 추리물 를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팬이었던 그는 “사이코패스가 나오거나 피가 낭자한 추리물은 좋아하지 않지만, 순수한 논리로 풀어가는 추리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배경이 20세기 말이라 공중전화가 막 나온 시대이고, 형사가 굉장히 신사다운 것도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캐나다 형사물 는 EBS에서 방영하는데, 케이블은 아니지만 지상파 중 시청률이 비교적 낮은 프로그램이어서 취향을 드러내는 창이 된다.
등을 만든 이송희일 감독은 집에 텔레비전이 없지만, 요즘 따로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OBS 경인TV의 라는 다큐멘터리다. 생태친화적인 삶이나 대안공동체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오지 원주민 이야기는 가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창이 된다. 그는 “남미 콜롬비아였나, 예전에 마약지대였다가 커피 재배지로 바뀐 곳이 나왔다. 정부가 비행기로 코카인 감시를 하는데, 커피와 코카인 나무가 비슷해서 멀리서 보면 식별이 안 된다. 오랫동안 코카인을 약재로 쓰고 차로 마셔온 원주민들은 코카인 재배가 범죄라는 생각이 없다. 이렇게 현대 문명이 배척하는 삶의 다양성을 본다.” 버마(미얀마) 사람들이 산꼭대기에서 벌이는 반전시위 같은 장면도 기억에 남는단다.
범죄심리학자 표창원씨는 스포츠 중계에서 ‘다른 세계’를 즐겨본다. 클럽에서 축구선수로 뛰는 아들과 함께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등을 즐겨 보는데 그는 “공정한 경쟁에 대한 갈구가 스포츠를 보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기울어진 한국 사회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망을 스포츠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물론 스포츠 구단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지만, 그래도 공정한 출발에서 서로 노력하면 달라지고 약자가 가끔은 역전도 하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브라운관을 통해 ‘다른 세계’로 떠나기도 하고 ‘길티플레저’를 즐기기도 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신소윤 기자 yoo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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