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송호균 기자
며칠 전 결혼기념일에는 간단히 외식을 했다. 주고받는 선물 따위 서로 퉁치고 살아온 게 몇 년이던가. 꼭 칼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따뜻한 밥상이라도 차려주고 싶었다. 자, 여기 옆구리. 마음대로 찌르세요. 아내가 답했다. “십이첩반상!” 예로부터 십이첩반상은 임금의 밥상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도 구첩까지만 상에 올렸다. 아내의 담대한 스케일에 걸맞은 데시벨로, 호기롭게 외쳤다. 까짓거, 하자!
함께 집 근처 생활협동조합을 찾았다. 그나저나 십이첩반상이라…. 레퍼토리부터 정리가 안 된다. 이것저것 나물로 가짓수를 채우고, 생선 굽고, 고기전이라도 지지고, 국이나 찌개를 곁들이면 되려나? 갈비찜도 해야 할까? 밥을 포함해서 십이첩인가, 반찬만 십이첩인가? 덜컥 겁이 났다.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초심을 잃어갔다. 마침 잘 마른 토란대와 고사리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딜을 걸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육개장은 어때?”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에 시원한 소주 한잔이면 십이첩반상이 부럽겠느냐고 구라를 풀었다. 전제군주적 메뉴를 골라놓고 내심 불안해하던 아내도 동의해줬다. 고기는 양지머리가 좋겠지. 시래기도 한 단 챙겼다. 단출한 재료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나빌레라.
고기의 핏물부터 뺐다. 시래기와 고사리를 불려놓고, 토란대를 삶으면서 깨달았다. 생각이 짧았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십이첩반상이 더 쉬울 뻔했다. 고사리는 한나절 불린 물로 삶았다. 토란대의 아린 맛을 없애기 위해 한참을 끓인 뒤 잔열로 몇 시간 동안 물러지게 두고, 찬물을 갈아가며 몇 번을 다시 우렸다. 풀어질 때까지 시래기를 삶고, 숙주나물은 살짝 데쳤다.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 시점은 이미 자정을 지난 뒤였다.
육개장은 무슨. 아쉬운 대로 족발을 배달시켜 저녁을 때웠다. 오기가 생겼다. 첫닭이 울기 전에 완성하고야 말겠다. 다시마와 대파, 무를 넣고 푹 삶은 양지머리는 잠시 식혔다가 결대로 찢어뒀다. 말린 고추가 없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에 식용유를 넉넉히 둘러 약한 불에 볶은 뒤 고추기름을 걸렀다. 고추기름의 앞에선 기름맛이, 뒤에선 부드러운 매운맛이 났다. 고춧가루와 간장, 다진 마늘과 파, 소금과 후추를 넣은 양념장에 고기와 나물류를 따로 무쳤다. 육수에 모든 재료를 부어 넣고 고추기름을 살짝 둘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팔팔 끓는 육수에 달걀 두 알을 풀었다. 팽이버섯과 대파도 더했다.
국자를 들었다. 맑으면서도 칼칼하고, 담백한 동시에 깊은 국물이 메마른 목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대략 12시간에 걸친 노동이 응축된 맛이었다. 다른 국물 음식에 비해 천대받는 게 육개장이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갈 줄이야. 아침상을 차리고, 고이 잠든 아내를 깨웠다. 그녀는 앉은자리에서 세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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