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밖에 있는 걸 좋아해요.” 종이에 쓰인 문장은 하나, 당연하다. 어서 빨리 크레파스를 들고 달콤한 풍경을 그려줘야 한다. 이미 그려져 있으니까 색만 칠하면 된다. 새를 까마귀로 만들거나 꽃잎에 파란색을 칠하면 엄마들은 의심할 것이 분명하다. 아이의 정신 상태를, 또는 아방가르드한 꼬마 화가로 착각할 수도.
박미나 제공
박미나는 1998년부터 학습과 놀이에 활용되는 색칠공부 도상을 그만의 ‘드로잉’으로 만들어왔다. 여기에 실린 드로잉은 낱장이지만 색칠공부 프로젝트 전체의 일부다. 작가는 그리기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질문하고 이에 응하는 여러 답안을 추출한다. 특정 색을 칠하라는 지시에 다른 색을 칠하고 집이 필요한 지면에 다른 형태를 넣고 두 이미지 이상을 겹쳐 프린트하는 식이다. 이로써 색칠공부는 어른 화가에게 진정 필요한 리얼 색칠공부가 돼갔다. 그러던 작가는 2011년 ‘회색하늘’ 시리즈를 시작했다. 색칠돼야 할 밝은 캐릭터와 공간은 회색 태도와 기운으로 변한다. 우아한 발동작의 공주는 주변이 온통 잿빛인 걸 알고 있을까. 흑색 연필을 슥슥 그으며 공주의 바탕 세계를 채워버린 작가는 딱 한 곳 잠재적인 상태를 남겨두었다. 공주의 뒤통수에 있는 태양. 태양만 희다. ‘회색하늘’ 그림들을 보면 명랑함이 허락되던 색칠공부 그림의 반전에 놀라고, 아이들 앞엔 ‘태양’이 쉼없이 등장한다는 사회학적 통계를 엿본다.
박미나의 드로잉은 물리적으로 가볍다. 이 드로잉이 담긴 액자는 산뜻하게 들려 이동될 것이다. 물감통을 뒤엎은 화가의 열정도 몇 겹의 물감을 바른 붓질도 여기엔 없다. 그림의 역사와 별 상관 없어 드로잉처럼 보이지만 사실 작가는 누구보다 그림의 현실을 구성하는 물감·색·형태·기호에 대해 철저히 연구한다. 현재 판매되는 물감과 연필, 색칠공부 도상 등 모든 종류를 조사하는데 여기서 ‘모든’은 은유가 아니다. 실제 경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애착’이다. 애착은 그림에 대한 망상으로 이어지고 망상은 다시 900여 점의 색칠공부 드로잉을 만드는 작가의 수칙이 된다.
박미나의 그림은 예전 그림들이 보내는 신호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려온 것일까. 회색 그림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예보일까. ‘오늘’의 그림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 에서 “저는 이제 어쩌죠?”라는 스칼렛의 말에 남자는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오”라고 말하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내일을 지속하게 하는 건 내일 뜨는 태양이 아니라 회색빛 ‘아이러니’다.
*‘현시원의 질문의 재발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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