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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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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얼음’

등록 2012-08-08 16:59 수정 2020-05-03 04:26

과거에 그려진 어떤 그림을 보면 미래에서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를테면 일본 에도시대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파도를 보고 있으면 뭐랄까, 영화 의 고담시티 장면 따위는 시시하다고나 할까. 그가 갖고 있던 재료는 텔레비전 모니터도 인터넷도 카메라도 아니었으며 다만 나무와 채색물감 정도였는데 지금 봐도 신선한 감각이 전혀 녹슬지 않은 날센 과도 같다.

세상에 바다가 있기는 있나 싶을 정도로 한동안 바다를 보지 못했는데 대신 호쿠사이의 유명한 채색 목판화 을 보고 있다. 어린 시절 여름을 외가가 있는 동해 해수욕장에서 보내며 수영은 잘 못해도 바다 느낌을 내려고 내가 언니랑 했던 일은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손을 잡고 괴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산에서 야호 내지르는 기분 이상으로 신이 났다. 파도가 사람들의 자글자글한 목소리를 다 흡수하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가도 이내 스르륵 사라졌기 때문이다.

호쿠사이의 파도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물방울이다. 파도는 추상화된 도형이 되었고 견고하고 큰 물결은 장식적으로 반복된다. 화면 위에 솟구치고 있는 파도는 액체인 바닷물을 고체 상태의 ‘얼음’으로 만들어놓은 형상이다. 있는 힘껏 팡 부풀어올랐다가 푹 꺼지는 풍선처럼, 클라이맥스와 함께 파도가 사라지려는 흔적이 시야에 들어온다. 파다닥 흩어지는 하얀 물방울들을 보자. 파도는 언제나 이렇게 거대하게 세 척의 배를 사로잡을 수는 없다. 한순간 훅 하고 사라지는 찰나야말로 파도의 본질이자 우키요에(浮世繪)의 본질이다.

떠도는 이야기와 고증을 합쳐보면 호쿠사이는 그림에 집중하려고 이사를 아흔 번이나 다녔고 이름을 서른 번이나 바꿨다 한다. 하지만 사계절 곳곳 후지산 곁에서 이를 바라보며 다양한 구도와 색채 감각으로 산의 근경과 원경을 끄집어내는 일만은 지루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위 판화는 호쿠사이가 제작한 중 일부다. 호쿠사이는 이 판화에서처럼 후지산을 조그만 삼각형으로 그려 화면을 압도하는 큰 파도와 대칭을 이루게 하는가 하면, 붉게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바꿔도 보았다. 비 오는 후지산 풍광도 그리며 다채로운 후지산을 놓치지 않았다. 후지산의 오늘이 그만큼 매 순간 변화무쌍했기 때문이리라. 어떤 날이든 후지산은 삼각형의 제 모습을 작게 또 크게 보여준다. 시원한 거 뭐 없나 생각하다가 호쿠사이 판화에까지 왔다. 무엇이든지 얼려먹고 싶어지는 이번 여름, 이 여름도 파도처럼 금방 사라지겠지!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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