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표종성(하정우)만 있었던 건 아니다. 화가 배운성도 있었다. 1922년 봄, 그는 이 도시에 도착했다. 작품의 이동보다 흥미진진한 건 작가들의 움직임이다. 어디든지 헤집고 다닐 수 있는 자유? 이보다 작가들을 매섭게 자극하는 건 제한 조건이 많은 이동일지 모른다. 배운성은 미술가가 되어 베를린에서 를 그렸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아니다. 작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아담한 박물관의 분위기가 나의 본능 속에 깊이 잠복하고 있던 예술감을 자극하여 처음으로 나의 예술에 대한 야심이라고 할는지 본능이라고 할는지 그런 것을 일깨워주었다.”
배운성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바다를 건너게 된 이유는 갑부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을 보필하기 위해서였다. 부잣집 아들들이 허약한 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지, 유학길 떠난 백명곤은 건강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고 배운성은 홀로 남아 유럽의 선생들에게 그림을 배웠다.
정면을 보고 있는 그림은 비밀이 없어 보인다. 뻥 뚫린 대청마루와 마당에 가족은 사진 찍는 날인 양 둘러 모였다. 탐정이 활동하려면 밀폐된 공간과 서랍에 숨긴 자기 사물이 필수라던데, 여기에선 사랑채 쪽으로 보이는 창문 너머의 깨알 같은 장독대마저 드러난다. 그림은 가족의 상태를 증명한다. 할머니부터 색동저고리 입은 손녀에 희고 쭉 뻗은 강아지까지 무려 17명이 총출동했다. 서양식 구두와 노모가 앉은 고급 의자, 아이들의 옷 문양이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배운성은 가족이 그리워서, 그러니까 이 그림을 늘 곁에 두고 보고 싶어서 그렸을까. 이 그림은 고향도 타향도 아닌, 가족도 타인도 아닌 상태를 그린다. 기품 흐르는 가족은 부잣집 백인기가(家)이며 그의 한옥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물론 배운성에게 이곳은 온전히 ‘남’의 집은 아니었다. 그림 속엔 그의 어머니를 닮은 여인들이 곳곳에 멀뚱히 서 있다. 연구자들은 그림 왼쪽 가슴까지만 보이는 남자를 두고 화가의 죽은 형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앞에 3분 이상 서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시선이 빙빙 돌아 어디에 찍혀도 흥미진진한 디테일이 있다. 디테일에 숨은 비밀을 파헤치던 탐정 셜록 홈스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면 누구를 가장 면밀하게 관찰할까. 배운성은 1930년대 후반엔 3년간 파리에 체류했고 1940년 서울로 귀국해 활동하다 월북했다. 이 그림은 지난해 12월 문화재로 등록된 근대 회화 6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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