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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비집고 들어올 타인은 없다

등록 2012-12-28 14:56 수정 2020-05-03 04:27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박근혜를 지지하는 친구의 엄마는 당신자식들과 함께 집 안에서 개표 방송을 보지 못하고 동지들을 찾아 밖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그들의 축제, 소외된 노인들의 공통분모를 만나려고 광장인지, 누구네 거실인지 모를 곳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친구는 엄마의 행동이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혹은 그래도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놓아버리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닐까 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오늘 아침부터 당선인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딸이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몰라도 누구를 대단히 싫어하는지 잘 아는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위로하려고 전화한 것이 분명했으나 말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엄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제 엄마 딸은 감옥 갈 거니까 각오하라고, 악다구니를 해대고 말았다. 엄마는 이번에 투표를 못했고, 그리고 아마 투표를 했더라도 1번에 투표하지 않았을 텐데도 그랬다. 당신들이 천년만년 살 나라도 아니지 않느냐는 심사가 포함되었던 거다. 엄마도 평상시 같으면 한소리 하셨을 텐데, 그냥 알았다… 하시고 전화를 끊는다.

 

박근혜를 향한 쓸쓸함의 연대

새벽부터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고 나온 노년층의 투표 열기가 대단했다 한다. 70대 할머니가 추운 날씨에 투표소를 찾았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소식, 투표소로 향하던 80대 노인이 철길 건널목에서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사고 소식도 전해졌다. 출구조사 결과, 50대와 60대의 투표율은 각각 89.9%, 78.8%로 높았다. 이들은 박근혜에게 압도적인 투표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 반해 20대는 65.2%, 30대는 72.5%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들 연령군은 상당수가 문재인에게 투표를 했다고 한다. 세대 간 투표가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낮았던 20대 책임론이 또 등장했다. 물론 선거의 강력한 한파가 휘몰아치는, 바로 하루 뒤인 오늘 일이다. 가난하고 학력이 낮을수록 박근혜에게 투표한 사람이 많았다는 통계도 보았다. 노인들과 가난, 저학력… 소외의 냄새가 진하다. 물론 그들이 계급적으로 기댈 수 있는 정치야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박근혜보다 문재인 정권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롭지 않겠나. 그런데 표심은 현실을 배반했다.

엄마 이야기를 전한 충북 괴산에 귀촌한 친구 이수진의 평이다. “4살 딸내미의 종이 되어 끊임없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의중을 헤아리려 하고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공감해주려 하지만, 내가 진정 노인 세대에게 그런 마음을 열려고 했나? 죽음 앞에 두려워하고 초라해지고 쓸쓸해지는 현실을 비슷한 박근혜에 대한 연대로 죽을 힘을 다해드러낸 건 아닐까? 공감과 연민의 힘이 투표로 분출된 것은 아닐까?”

 

가난하고 외로워야 노인이다

친구의 말처럼 노인들의 현재에는 핵발전소도 없고, 쌍용도 없으며, 강정도 없다. 민주주의나 국정원이나 국가보안법도 없다. 그들의 젊은 날은 지금보다 더 힘겨웠을 것이나 돌아온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을 비집고 들어올 타인은 없었다. 더 이상 바라볼수 없는 미래, 처절함, 찌질함, 그런 것들이 그들의 현실이었을 테다. 친구 말대로 그들의 정서가 조금 더 풍요로웠다면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실의 고단함을 회피하기에 왜곡된 과거의 풍요로움보다 더 기막힌 선물은 없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외로워야, 호명되지 못해야 노인으로 불린다. 박근혜나 이건희는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물리적인 나이가 같다고 노인일 수 없다.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이름을 불러, 초라하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함께할게…라는 누군가의 진실한 연대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이 누구 몫인지 몰라 어줍지 않게 우리 모두의 것이라 말하려다가 고쳐 쓴다. 그 몫은 내 것이다. 노인들의 서러움을 달래줘야 할 의무에 대한 몫 말이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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