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십수 년 전, 수능을 볼 때 제2외국어 과목으로 아랍어를 택했다. 경쟁이 치열한 중국어나 일본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알파벳부터 익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생소한 언어, 모서리 없이 둥그렇고 강물이 흘러가듯 이어지는 문자를 쓰는 게 즐거워서 꽤 열심히 공부했다.
시험이 끝나고 모조리 잊어버렸던 아랍어를 다시 만난 건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서였다. 여기선 한국어, 영어, 아랍어로 구호를 외친다. 2025년 10월18일에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2년을 규탄하는 전국 집중행동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보신각 앞에 수천 명이 모였다. 팔레스타인 국기색 중 하나인 빨간색 옷을 입거나,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전통 스카프 ‘케피예’를 두른 채 모였다. 짧은 가을 끝에 칼바람이 불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하나도 춥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팔레스타인이 정한다!”
“From the river to the sea, Palestine will be free!”(지중해에서 요르단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되리라!)
“حرة، حرة، فلسطين(후라 후라 팔라스틴!)”(팔레스타인에 해방을!)
1단계 휴전 협정이 발표됐지만, 여전히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그다음으로 무사히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한 1단계 휴전이 발효된 지 아흐레 만인 10월19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의 공습이 재개됐다.
지난 2년간, 괴로운 마음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을 조금씩 읽어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싶어서였지만, 현재를 만든 과거의 사건들을 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무력하기도 했다. 책만 읽고 있는 게 죄스럽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읽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이날은 출판사 접촉면에서 펴낸 ‘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었다. 시구들은 구호 같았고, 구호들은 시 같았다. 행진 중에 접촉면 대표 산리의 다음 발언을 들으며 내가 지나온 글들을 떠올렸다.
“지난 2년간 팔레스타인 땅에서 너무나 많은 죽음과 고통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회복될 수 있는 피해인가 싶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누구보다 강하게 이 시간을 버티고 또 버티며 이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먼 땅에서 이를 지켜보는 저는 그 시간을 함께 기록하고 전달하는 역할의 일부를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글자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세계의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로 전달됩니다. 그 글자에 눈을 맞추며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세계와 잠시 만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이기까지 여러분도 수많은 글자를 지나왔을 것입니다. 글자는 우리를 모이게 하고 마음을 모으게 합니다. 글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이 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해초’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구호선단 ‘천 개의 매들린호’에 탑승한 유일한 한국인. 아직 외국에 머무르는 그의 얼굴이 스크린 위로 떠오르자 마음이 요동쳤다.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활동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은 여성. 목격한 것을 책임지고, 더 깊은 연결을 만들어내려고 떠난 그의 사랑과 용기 덕분에, 그를 통해 우리 마음을 가자에 더 가까이 보낼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데, 내가 포기할 수는 없다. 식민과 전쟁, 분단의 역사를 가진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이 곧 나의 해방이며 가자의 해방이 지구의 해방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팔레스타인이 우리에게 왔던 해방 이상의 온전한 해방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집회에서 외친 구호대로 다 이뤄질 날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작가
*김주온 작가님의 ‘노 땡큐!’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김주온 작가님과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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