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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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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는 왜 우크라이나를 때리나

러시아 정권 쪽 프로파간다 받아쓰기하듯 하는 ‘자칭 진보’
‘강자’ 입장에서 ‘국익’ 내세워 젤렌스키 조롱하듯 논평
등록 2025-03-15 17:51 수정 2025-03-20 13:49
방송인 김어준씨가 유튜브에서 운영하는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이 2025년 3월3일 공개한 방송에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왼쪽 위부터 시계방향)과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우교수, 김희교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과 교수,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 등이 출연해 ‘파국으로 끝난 미·우크라 회담… 외교 전문가들의 진단은?’이라는 주제로 대화하고 있다. 방송 갈무리

방송인 김어준씨가 유튜브에서 운영하는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이 2025년 3월3일 공개한 방송에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왼쪽 위부터 시계방향)과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우교수, 김희교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과 교수,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 등이 출연해 ‘파국으로 끝난 미·우크라 회담… 외교 전문가들의 진단은?’이라는 주제로 대화하고 있다. 방송 갈무리


한국의 근대적 정체성이란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간직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 된 뒤에도 분단 체제를 강요받으며 현재까지도 미국과 불가불 비대칭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은 한국인의 근대적 정체성이나 자아의식을 결정짓는다. 물론 ‘식민지 유산’과 ‘글로벌 패권 국가와의 비대칭적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정파에 따라 달라진다. 뉴라이트로 알려진 극우들은 전자도 후자도 좋게 해석하려고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지만, 다수의 한국인에게는 여전히 ‘식민지의 아픔’ ‘침략을 당한 나라의 고통’에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정서가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국외에서 벌어지는 각종 침략 전쟁들에 대해 한국의 여론은 썩 좋지 않았다.

 

침략당한 피해자에 대한 공감

실은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확인된다. 1929년 여름, 중국의 만주 군벌이 제정 시대 이래로 러시아가 이권을 차지했던 동청철도를 회수하려 하자 소련은 중국 영토 내에 침입해 몇 개월 동안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그때만 해도 나름대로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동아일보 같은 민간 신문들은 당시 소련군의 중국 영토 침입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윤치호같이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를 상당히 좋아했던 식민지 조선의 보수주의자도, 1935년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 자기 나라를 지키려고 사력을 다했던 에티오피아 병사들을 극찬했다. 즉, 식민지 시대에는 진보든 보수든 침략만큼은 비판하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었고 침략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흔한 것이었다. 침략을 당한 조선의 처지와 다른 피해국들의 처지가 너무나 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재야의 지도자 격이었던 함석헌이나 리영희는, 한국군까지 동원됐던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대해 목숨을 걸고 비판한 것으로 유명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파병을 결정했을 때 지지도는 반토막이 났다. 진보 진영 인사가 미국 침략을 지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19~2020년 홍콩의 시위운동이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현지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됐을 때도 국내의 진보 진영은 대체로 중국에 비판적이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거나 그 변방 지역의 민주화나 자치 강화 운동을 강경 탄압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자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범진보’ 일부의 러시아 편들기

그런데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한국 범진보 진영 일부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심한 경우에는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운동의 지도자였던 한 유명 지식인은 “다극화를 위한 전쟁” “집단 서방과의 대결” “우크라이나 나치들의 돈바스 인민 학살” 등 러시아 정권 쪽 프로파간다를 거의 받아쓰기하듯 그대로 한국어로 재생산했고, 일부 논객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외세의 도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구걸꾼’ 취급을 하기도 했다. 위 사례는 다소 극단적이지만, 심지어 반전 평화 활동가 일부까지 “나토 동진이 러시아의 행동을 촉발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러시아의 침략 책임을 상대화시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만약 친중국 방향으로 간 멕시코를 미국이 침략했다면 이들의 반응이 과연 이와 같았을지 묻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반응의 차이는, 침략국이 러시아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국가들과 역사적으로 비대칭적 관계를 맺어온 중국이나, 지금 남한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이 침략을 저지르면 이는 한반도와 직결된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러시아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단지 ‘먼 나라’로 인식된다.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아예 인식 자체가 희박하다. 또 우크라이나 문제와 국내 문제가 잘못 연결됐다는 점도 이런 반응을 자아낸 측면이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원했을 당시 결국 내란 수괴가 된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쇼’를 몇 차례 벌였다. 실제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크라이나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 우크라이나는 망국적 실정을 저지른 윤석열과 관계를 맺은 친미 국가로 잘못 인식돼 진보 쪽의 민심을 잃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대러 협상의 ‘카드’로 이용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크라이나의 자주독립 투쟁이 본질상 ‘친미’와 관계가 없음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국익’ 내세우는 진보의 보수화

우크라이나 투쟁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푸틴 정권이 복원하고자 하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다. 한국처럼 ‘피침략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탈식민 사회에서는 ‘민족자결권’의 실현을 원하고 실질적 독립 보장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고소득 사회가 되어 세계 무대에서 이미 스스로를 ‘강자’로 인식하는 보수화된 한국에서 최근 일부 진보 진영의 의식 형태 자체가 상당히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2003년에, ‘국익을 위한 파병’을 요구했던 강경 보수에 맞서서 한국의 진보는 이구동성으로 ‘정의’와 ‘인도’ ‘국제법 준수’를 외쳤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분류하는 많은 이가 ‘국익’, 즉 러시아와의 좋은 관계 유지 등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동정 표현을 자제하고 우크라이나 민간인에 대한 지원마저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는 그렇다 치고 진보마저도 ‘국익’을 내세운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 사회적 보수화를 반영하는 것일까. 백악관에 가서 ‘정의’를 요구했다가 트럼프한테 면박당하고 쫓겨난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조롱하듯이 논하는 이들을, 만약 독립운동가나 함석헌·리영희 선생 같은 분들이 봤다면 과연 뭐라고 논평했을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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