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호 레드기획
이것은 예술인가. 지난 11월3일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1리에 있는 이수하·김영자씨네 집이 헐렸다. ‘도롱이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54년 된 이 집을 허물고 옛집에서 나온 자재를 추스른 사람들은 ‘포천 도롱이집 이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15명의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옛 기둥이며 서까래를 새 집터로 옮겨 주막을 지을 생각이다. 지금은 이수하·김영자씨가 운영할 도롱이 주막에서 팔 막걸리를 빚기에 분주하다.
이것은 미술인가. 경기도 미술관 앞에는 닭들이 산다. 정기현 작가가 마을 사람들에게 지어준 ‘아트 닭장’이다. 닭장은 사람이 살고 싶을 만큼 예쁜데다 닭똥 냄새를 줄이는 바닥도 깔았단다. 작가는 닭장 전문가인가, 발명가인가 아니면 설치미술가인가. 지금 미술계는 ‘동네 미술’이라는 이름의 낯선 손님으로 북적인다. 아트 향기가 사라지고 닭똥 냄새, 술 냄새, 사람 냄새가 전시장을 채운다.
“주인 찾아 태어난 곳에 자리잡은 것”동네 미술의 주요 전시장은 당연히 ‘동네’다. 지난 10월20일부터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104마을에서는 서양화가 이성국씨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 서양화 34점과 풍속화 19점. 웬만한 개인전으로 손색없는 규모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갤러리가 아닌 백사마을 시장에 있는 가게와 교회들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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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입구에 있는 현대이발관에는 이발사 김창호씨 초상화와 머리를 깎는 손님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걸렸다. 목공소 주인은 지금 없지만 목수 신동옥씨의 초상화가 목공소를 지키고 있다. 동네 사랑방에는 1967년 서울의 개발계획에 밀려나 이곳에 거처를 구한 초기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가 걸려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백사마을을 주제로 전시를 연 서양화가 이성국씨는 “그림이 주인을 찾아 들어가 태어난 곳에 자리잡은 셈”이라고 했다. 장소가 갤러리가 아니다 뿐이지 작품으론 손색없다. “저거 안길 사는 김씨 아니가.” 주민들이 단박에 알아볼 만큼 인물들을 꼭 빼닮되 그 사람의 성격이며 살아온 이력이 짚일 만큼 세심한 붓칠이다. 화가가 10년을 백사마을에 드나들며 일일이 주민들을 사진으로 찍고 유화로 옮겨 그렸으니 그 공력 또한 얼마나 클지 짐작된다. 이성국씨는 “역사적으로 초상화는 치적을 과시하고 싶은 절대권력자의 전유물이었다. 개발의 역사에서 밀려났던 마을 주민들의 초상화를 통해 그들이 현대사의 주인공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백사마을 주민들을 주인공 삼은 이유는 마을의 이력 때문이다. 백사마을은 청계천·종로·영등포 지역의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불암산 서북쪽 자락에 찾아들어 생겨난 마을이다. 시유지였던 이곳에 할당된 26.4m²씩의 땅에 그들은 군용천막을 치고 그해 겨울을 났다. ‘백사’라는 마을 이름은 중계동 104번지에서 유래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는 하지만 고치고 서로 트고 수십 년씩 이웃을 만들며 공동체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2006년 개발 광풍이 밀려든 뒤 이곳은 달동네가 아닌 ‘개발바라기 마을’이 됐고 마을 시계는 멈춰버렸다. 반은 백사마을 주민이 된 화가 이씨는 “투기자본이 들어오자 발전도 개ㆍ보수도 멈췄다. 지금은 호흡기를 단 채 연명치료만 하는 환자나 다름없다”고 했다.
이성국씨는 백사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바로 옆동네 아파트단지 주민이다. 1996년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려던 그는 철거민과 입주민의 처절한 싸움에 휘말렸다. 똑같은 싸움이 백사마을에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지난 5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104마을 재개발계획안’을 최종 승인했다. 그러나 지금 마을의 80%는 외지인 소유다. 원주민들 대부분은 몇천만원에 소유권을 팔고 구들장도 없는 집에서 여러 해 세입자로 지낸다. 이씨는 백사마을에도 용산처럼 망루가 설 것 같은 예감에 몸서리친다. “다음 전시회는 아마도 개발 과정의 처절한 싸움을 담게 될 것”이라며 “동네를 사분오열시키는 건설족들과 이권 다툼을 벌이는 자들이 모두 내 그림의 소재요 먹잇감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화가이자 이 마을의 파수꾼인 셈이다.
그림이 그 자리에 살던 달동네 주민들의 역사를 전한다. 화가 이성국씨는 10년 동안 백사마을을 드나들며 주민들의 사연과 풍경을 채집해 그림으로 그려왔다. 그의 전시회가 열린 마을의 이발소. 이성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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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미술은 삶의 문제다. ‘도롱이집 이주 프로젝트’를 끌어온 ‘문화살롱 공’의 박이창식 대표는 “날마다 전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도롱뇽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교동마을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내년이면 없어진다. 2000년부터 한탄강 홍수 조절용 댐 건설이 추진되자 32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교동마을엔 이주를 기다리는 19가구 주민들만 남았다. 2009년 예술가 집단 ‘문화살롱 공’이 이곳을 찾았을 무렵 주민들은 이미 마을이 물 밑으로 잠기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찢긴 민심, 무력한 공동체. 외지에서 온 예술가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름 없는 민중의 삶을 역사로, 유물로 만드는 일부터 했다.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감독, 화가, 도예가 등 장르도 다양한 예술가들은 곧 사라질 마을의 풍경을 기록하고 집집마다 간직하고 있던 사소한 유물들을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아진 물건들로 2010년 마을 한가운데 ‘교동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교동마을 문화기록관을 세웠다. 기록관은 수몰을 앞두고 떠난 빈집에 차려졌다. 3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기록한 책 2권과 다큐멘터리, 전시회가 있었다.
손때 묻은 농기구를 모아둔 손방, 주민들의 갖가지 표정을 담은 사진, 그릇이며 문패는 수몰 예정지 주민들의 살림이어서 더욱 애틋하다. 소똥에 빠뜨렸던 휴대전화, 스펀지 공장에 다니며 쓴 가계부, 소주병 만드는 회사에서 11년간 일하며 기념으로 받은 유리 공예품들은 곰살궂은 사연을 듣다 보니 유물이 맞다. 박이창식 대표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도롱이집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얼마 전 해체를 마친 이 집은 고스란히 새 이주터로 옮겨진다. 물론 오래된 집의 자재만으로 새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기둥과 판재 일부는 새 집에 쓰고 흙벽은 흙을 골라 도자기로 만든다. 그 도자기를 주막을 열었을 때 막걸리 사발로 쓸 계획이다. 50년 세월이 담긴 막걸리를 마시자는 낭만적인 계획이다. 마루였던 판재로는 선반과 탁자도 만든다.
애초 집·동물·사람 등 사라질 것들을 기록하려 했던 그들의 작업은 이제 자연스레 수몰지 주민들이 삶을 어떻게 이어나갈지로 커졌다. 마을 주민들과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우고 마을에서 손두부 잘 만드는 할머니를 모셔다 안주도 만든다. “이제는 동네 주민들과 마을이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도 나눠요. 이젠 외지인이 그런 말 한다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요. 내년 초 도롱이집이 지어지면 새로 마을을 만들 때 모델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이창식 대표의 말이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동네 미술은 ‘예술이 밥 먹여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란다.
박이창식 대표는 함께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이곳에서 우린 작가가 아니다. 작품할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전시 ‘동네 미술’을 기획한 경기도 미술관 황록주 학예연구사는 동네 미술이 벌이는 일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예전 미술가들은 큰 권력의 폼 나는 하수인들이었다. 미술가들은 작품 속으로 높은 곳으로 사라지는 반면, 동네 미술을 하는 이들은 낮은 곳으로 삶 속으로 사라진다. 동네 미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예술이 갖고 있는 독립적인 지위를 내려놓고 그들이 만든 발랄한 삶의 형식이 실제로 동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아주 의미 있는 일로 바꾸어 선사한다.” ‘동네 미술’이라는 전시가 미술관 안에서 열리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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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네 미술가들은 문화운동가처럼 기울어가는 지역에 들어가 마을의 삶에 발랄한 아이디어를 선사한다. 재활용 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인계시장 프로젝트>. 경기도 미술관 제공
동네 미술의 다른 이름인 ‘커뮤니티 아트’가 강력한 장르로 떠오르고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과 발맞춘 민중미술이나 2000년대 관이 주도한 공공미술과도 또 다르게 이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찾아 자연스레 떠다니다가 주민들과 삶을 고안하고 만들어낸다. 내년 1월까지 열리는 이 전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요즘 동네 미술이 벌이고 있는 일들이 보인다.
전시장 한가운데 부엌이 보인다. 장롱 문짝, 밥상 상판, 병을 주워 만든 이 부엌은 놀랄 만큼 아름답다. 경기도 수원 인계시장 안마시술소에 모여 살던 작가들이 주민들이 버린 물건을 모아 만들어낸 소통의 공간, 창조의 작업대다. 전시장엔 택시도 들어왔다.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이 대대로 택시 운전을 한 홍원석 작가는 운전을 하며 보이는 풍경을 화폭에 담던 화가였다. 그런데 시골 마을에서 택시 기사 노릇을 하다가 아예 아트 택시 운전자로 전업했다. 전시장에는 그의 회화와 설치작품들이 있고 내년 택시 승객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그의 택시는 내년에 평양으로 달릴 예정이다. 지난해 경기도 남양주 광릉 내 마을에서는 ‘논아트 밭아트’라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작가들은 마을에 모여서 오리를 키우며 ‘카페C’와 ‘공작소R’라는 가설구조물을 만들었다. 전시장에는 그들이 만든 오리놀이터와 공장노동자·농민·이주노동자라는 이질적인 주민들과 한데 놀았던 흔적을 남겼다.
달동네 화가로 남기를 선택하다그런데 이것이 미술인가, 문화운동인가 아니면 그냥 생활인가. 황록주 연구사는 이렇게 말한다. “동네 미술은 미술이 가진 문법체계를 완전히 버렸다.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 일상이 병들었다는 신호다. 수몰지구 주민들의 삶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얼마 안 되는 보상금으로 해결하려는 와중에 작가들만이 주민들의 상처에 눈을 돌렸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미술이 도맡은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네 미술의 성공은 좌대에 올라앉은 예술품, 희소성 원칙에 따라 사람들에게 소구하는 기존의 미술 시대가 곧 끝날 수도 있다는 신호다.”
‘도롱이집 이주 프로젝트’는 11월에 끝난다. 그러나 참여작가들은 주민들이 새 터전에 자리잡을 때까진 정부 지원이 없어도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백사마을 화가 이성국씨는 전시회가 주목받아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 작품이 시내 갤러리로 나가면 나는 풍경화 작가로 전락할 것”이라며 달동네 화가로 남아 있기를 택했다. 그는 “미술이 갤러리 권력과 시장을 좇는 현상을 경계한다”며 “원래의 미술처럼 삶에서 태어나 삶에 동반하는 풍경이 옳다”고 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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