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목구멍 깊숙이
솁은 말씀하셨다. “네 요리는 아직 꼬시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드라마 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스페라’의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서유경(공효진)의 창작 요리 ‘떠오르는 태양’에 대해 내린 이 평가는 요리가, 그것도 파스타가 얼마나 유혹적인 음식인지 일깨운다는 점에서 절묘하다. 물론 식당에서 연애하는 여타 다른 드라마도 때깔 좋은 음식의 클로즈업으로 시청자의 침샘을 자극할 줄 안다. 하지만 당장 시각을 자극하는 나체 사진보다 더 가슴을 설레게 하는 건 상상력을 자극하며 오감을 일깨우는 장면 혹은 텍스트다. 레스토랑에서 잘린 서유경이 절치부심하며 알리오올리오 만드는 연습을 하다가 싱크대에 버렸던 면을 집어먹으며 놀라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떤 시각적 데커레이션도 다 덜어낸 자리에는 적당하게 간이 밴 면 한 가닥이 입부터 목구멍까지 쏘옥 빨려오는, 면 특유의 섹시한 식감만이 남는다. 포르노의 고전 에선 목구멍 안에 성감대를 가진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매끈하게 빨려 들어가는 면은 단순히 혀뿐 아니라 목구멍의 쾌감까지 자극한다. 하여 밤에 드라마를 보며 굳게 다짐했다. 달달한 연애고 나발이고, 날이 밝으면 어서 파스타 전문점에 가서 알리오올리오를 시켜먹으리라고. 위근우 TV평론가
만화
아버지의 암수술 날 먹은 것
107권까지 나온 , 화려한 기예 대결이 끝없던 등 스펙터클을 겨루던 음식만화가 소박해졌다. 이후부터 집밥과 치유가 음식만화의 화두다. 는 마음을 달래주는 집밥 이야기를 그것도 보통의 가정이 아닌 동성애자들의 식탁에서 풀어낸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을 그린 요시나가 후미의 새 작품이다. 에서는 주인공이 대기업 상속자였지만 에서는 동성애자 변호사 카케이 시로다. 함께 사는 애인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 시로는 페이지 곳곳에 알뜰 장보기 비법이나 남은 재료 재활용 아이디어를 떨군다. “저기, 저기, 어제 저녁 뭐 먹었어?”로 시작한 책은 최근 나온 6권까지 그 질문에 충실하게 답한다. 아버지가 암수술을 마치고 나온 날 저녁에 먹은 식은 고기 감자조림, 변호하던 할아버지가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날 받아든 콘비프 어니언 토스트와 두유를 넣은 카페오레, 다른 사람의 연애에 얽혔을 때 만든 토마토 닭고기찜과 까치콩 감자조림들은 동성애자의 불안한 삶이나 벌써 47살이라는 현실에 따뜻한 이야기를 건넨다.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밥은 더욱 따뜻하게 데워졌다. 남은주 기자
책 'Joy of Cooking'
이런 따라하고 싶은 레시피라니
2009년 4월28일 박칼린이 에 나왔다. ‘남자의 자격’으로 유명해지기 전이다. 그녀가 세 번째로 낭독한 책은,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올라온 제목으로는 ‘할머니 애나의 크리스마스 과일케이크 레시피’다.
건오렌지 껍질과 건체리, 백건포도, 건크랜베리, 건파인애플 등 말린 과일 등속과 버번 1병, 브랜디 1병, 체리 리큐어 1병까지 재료 목록을 읽는다. 이윽고 만드는 방법. “먼저, 위스키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음을 한잔 한다. 큰 볼 하나를 꺼내 재료들을 준비하는 동안 위스키가 최상품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맛본다. 전기 믹서를 켠다. 위스키의 상태가 저하하지 않았나 한 번 더 확인하고 믹서를 끈다. …이쯤에서 버번과 체리 리큐어의 도수와 맛도 꼭 확인해야 한다. …다음 밀가루를 체에 걸러 곱게 하든지 말든지… 그리고 생각나면 소금도 체에 거르든지 말든지… 뭐 상관있겠습니까? …오븐에 기름을 두르고 빵틀을 켜서 섭씨 350도 곱하기 화씨 나누기 위스키도수로 오븐 온도를 맞춘 후 볼은 창밖으로 던지고 술 세 병 몽땅 다 챙겨서 방에 들어가서 잔다.”
이런 따라하고 싶은 레시피라니. 그녀가 들고 와서 “어머, 거미줄도 있네”라고 한 책은 (Joy of Cooking). 오래되었고(1931년) 두껍다(1132쪽). 이윽고 미국에서 도착한 책은 미국 아줌마들이 만드는 요리는 다 들어 있지만(4500개), 부엌 찬장에 요리술 대신 백화수복 1ℓ짜리를 넣어놓는 주부는 경멸하는 경건한 요리책. 아직 박칼린이 읽은 요리는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구둘래 기자
고전 조리서
라면 옆에 곰발바닥
헬스장에 걸린 모니터 가운데 적어도 33%는 종합격투기 UFC 재방송이거나, 야구 혹은 농구 재방송인 이유가 있다. 운동할 땐 남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는 게 최고다. 경쟁심을 자극받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 너도 이 짓을 하고 있구나’라는 기묘한 연대감이랄까. 마냥 반가움 77%+묘한 허탈감 23% 정도의 멘털. 그래서인지 나는 늘 라면 먹을 때 을 꺼내든다. 집에 TV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은 17세기 경상도의 양반 가문 여성인 안동 장씨가 며느리들을 위해 쓴 조리서다. 음식문화사가 사이에 바이블로 통한다. 고기·떡·술 등 수십 가지 조리법이 있다. 내가 자주 펼쳐보는 챕터는 ‘웅장’편이다.
‘웅장(곰발바닥): 석회를 넣어 끓인 물에 (곰발바닥을 잠깐) 담가 털을 뽑아 없앤 후, 깨끗이 씻고 간을 쳐서 하룻밤을 재두어라. (이튿날 물이) 매우 솟구치도록 충분히 끓인 후 (아궁이의) 불을 반으로 줄이고 약한 불로 다시 무르도록 고아쓰라. 곰발바닥이 다 힘줄로 된 것이니 다른 고기와 같이 무르게 하기가 쉽다. 곰발바닥을 소발 그을리듯이 불을 많이 때고 그을리면 털이 다 타고 발바닥 가죽이 들뜨게 된다. (들뜬 가죽을) 벗겨버리고 깨끗이 씻어 무르게 고아 조각으로 잘라서도 쓴다. 발가락 사이를 칼로 긁어 째고 간장기름을 발라 구우면 더 좋다.’
끓는 물에 넣으면 바로 고기국물이 탄생하는 후기자본주의의 마법 같은 수프를 욱여넣을 때면, 더더욱 셀 수 없는 노동이 들어가는 곰발바닥 요리를 상상하게 된다. 조리법이 대부분 직접 따라하기 어려워 상상만 하게 되므로, 역설적으로 이 책은 식욕자극제로 괜찮다. 막혔을 때 변비약을 먹듯, 식욕 없을 때 이 책을 펼치면 꽤 도움이 된다. 가질 수 없는 건, 늘 욕망을 자극하니까. 고나무 기자
소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
라우라 에스키벨은 등 다른 소설에서도 사랑을 논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단 한 권의 강렬한 책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목만으로는 달달한 로맨스소설 같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고 그러면서도 사랑 이야기가 절대적인 은 사실 자체로 한 권의 요리책이다. 달마다 바뀌는 요리는 낯선 재료들의 향연, 시끌벅적한 남미의 파티 분위기를 양념으로 끼얹으며 읽는 이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첫 번째 요리는 ‘1월 크리스마스 파이’. 파이는 달콤하거나, 기껏 상상력을 펼쳐봐야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월 크리스마스 파이의 재료는 정어리 통조림, 초리소, 양파, 오레가노, 세라노 칠레고추 통조림, 페이스트리 반죽이 재료다. 어른어른 알 듯 말 듯한 맛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읽을 때마다 이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맛이 상상 속 미뢰를 휘감는다. 가지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느끼고 싶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또 있을까. 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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