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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찬양·역사 왜곡 빼곡한 전두환 생가

경상남도
합천군 1983년부터 복원·관리 중… “다크 투어리즘 현장·역사적 사실 정확히 기록해야”
등록 2025-01-18 08:29 수정 2025-01-23 15:12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는 전두환 생가. 이곳에서 전두환은 아직도 ‘자랑스러운 대통령’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는 전두환 생가. 이곳에서 전두환은 아직도 ‘자랑스러운 대통령’ 지위를 누리고 있다.


2024년 12월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1980년 5월17일 자정 전두환 등 신군부가 선포한 이후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죽은 전두환(1931년 1월18일~2021년 11월23일)이 사람들의 입길에 다시 오르고 있다.

1월18일 전두환 생일을 앞두고,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는 전두환 생가를 방문해 그의 흔적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이곳에서 전두환은 아직도 ‘자랑스러운 대통령’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아직도 ‘자랑스러운 대통령’?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마당이 있고 맞은편에 초가지붕을 인 안채가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헛간과 곳간 등 별도 건물이 있었다. 전체 터 면적은 631㎡(191평)로 1931년 이전부터 이 규모였다면, 당시 시골집으로는 상당히 큰 집이었다.

합천군은 전두환이 현직 대통령 시절이던 1983년부터 이 집을 복원해서 관리하고 있는데, 현재 있는 집은 1988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1988년 11월11일 영남대·경북대·계명대 학생 6명이 전두환·이순자 부부 처벌을 촉구하며 화염병을 던져서 이 집을 완전히 불태웠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역사적 사실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전두환 찬양 일색의 안내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1931년 1월18일) 빈한한 가정형편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고학하며 어렵게 마쳤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정규 4년제의 첫 졸업생으로 임관된(1955년) 이후 공수특전부대의 대대장·여단장 등 지휘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8년 1·21사태 때에는 청와대의 외곽 경호를 맡은 수도경비사령부의 대대장으로서 사전에 치밀한 대비태세를 갖춤으로써, 북한 특공대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격퇴하는 공로를 세웠다. 동기생 가운데 맨 처음 장군이 되어(1973년) 대통령 경호실차장보로 근무하다 소장으로 진급하여 1사단장으로 부임했다(1978년). 이 시절 북한이 휴전선 이남으로 파 내려온 제3땅굴을 발견했다.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됐는데, 그 수사과정에서 12·12사태가 빚어졌다. 이후 제11대 대통령이 되었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1981년 3월 취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때의 단임 실천 약속에 따라 1988년 2월 퇴임함으로써 40년 헌정사에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 생가 안채의 방 안 벽면에는 전두환을 미화하는 사진들이 붙어 있다.

전두환 생가 안채의 방 안 벽면에는 전두환을 미화하는 사진들이 붙어 있다.


시민 학살·‘내란수괴죄’ 등 기록 없어

안내판에는 ‘빈한한 가정형편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고학하며 어렵게 마쳤다’라고 돼 있으나, 현재 복원된 집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수사과정에서 12·12사태가 빚어졌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제11대 대통령이 되었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고 했으나, 실제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최규하 대통령을 쫓아내고 1980년 8월27일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았으며, 대통령 간접선거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1980년 10월27일 새로 만들어 1981년 2월25일 대통령직에 다시 올랐다.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는 것 역시 1987년 박종철·이한열 등 많은 학생과 시민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피 흘린 까닭에 쫓겨나듯 물러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게다가 안내판에는 ‘내란수괴·살인마 전두환’의 행적은 단 한자도 적혀 있지 않다. 전두환은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발령돼 있던 비상계엄령을 1980년 5월17일 자정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광주에 군대를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다. 대통령 퇴임 이후엔 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사면되면서 풀려났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생가 안채의 방 안 벽면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찍은 사진들로 도배돼 있다. 19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 취임식, 1982년 11월12일 한국을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1983년 4월12일 프로축구리그 출범 개막 경기장 방문, 1984년 6월26일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식, 1986년 9월26일 86아시안게임 참가선수단 격려 등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1988년 11월11일 영남대 재학 당시 전두환 생가를 불태운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던 남태우(59)씨는 “전두환은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광주시민들을 학살했으며, 1987년 시민항쟁으로 쫓겨났다. 이 사실을 완전히 숨기고 찬양·미화하는 전두환 생가는 한국판 야스쿠니신사”라고 비판했다. 합천 지역 시민단체 ‘생명의숲 되찾기 합천군민운동본부’의 고동의 간사는 “전두환 생가는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인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이기 때문에 보존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란수괴이자 학살자인 전두환의 실체와 역사적 진실을 정확히 알리는 공간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기념 금지법’ 국회 청원 통과

한편, 2024년 11월15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누리집에는 ‘전두환 기념사업·기념물 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가 올라와 12월15일까지 10만5685명의 동의를 받았다. 국민동의청원은 청원서 제출 30일 이내에 5만 명 이상 동의를 받으면 국회에 접수된다. 접수 요건의 2배 이상 동의를 받았기 때문에 국회는 채택된 청원에 대해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공식적으로 밝혀야 한다.

 

합천(경상남도)=글·사진 최상원 한겨레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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