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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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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뼛속까지 좌파였다나~

오른쪽 가슴의 가제 손수건
등록 2012-09-15 16:40 수정 2020-05-03 04:26

나는 ‘신념’을 정과 망치로 강요당한 적이 있다. 고문 피해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고문당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나는 강남 스타일이라 고문당하기 전에 다 불어버렸을 테니까.
2006년 말 병원 문을 두드렸다. 32년 킁킁이 인생과 단절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비중격만곡, 그러니까 콧구멍 두 개를 가로지르는 뼈가 한쪽으로 심하게 휘는 증세가 있었다. 죽을 병은 아니었다. 명의 허준의 대사를 빌리면 “이것은 병이 아니라 증이옵니다”, 딱 그 정도.
이쪽 계통으로 보수신문 의학면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거다. 적의 칼날 앞에 내 콧구멍을 내밀다니. 병원장은 보자마자 “심하네. 그동안 어찌 살았냐”며 걱정해줬다. 보수의 따뜻함이여.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코뼈가 부러진 적이 있냐”고 했다. 없다고 했다. “부러진 코뼈가 휜 상태로 굳은 거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코뼈는 휘었다고 했다. “어쨌든 부러진 적이 있다”고 했다. 내 삶이 이리 하드보일드했나. 부러진 코를 으드득 두 손으로 맞추고 핏물을 칵 뱉어내는 그런 인생이었다니.
수술 날짜를 잡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도 한 차례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뼈가 자랄 때라, 뼈를 깎지는 않고 협착 부위를 전기로 지졌다나 뭐라나. 전기고문을 당한 셈이다. 4년 뒤 세수를 하다가 콧구멍에서 솜뭉치가 나오는 충격적 의료사고까지 당했다. 수술할 때 집어넣은 솜이 그제야 나왔다나 뭐라나. 그런 시절이었다.
콧구멍 하나로 숨을 쉬다 보면 코가 잘 막혔다. 입으로 숨을 쉬다 보니 감기를 달고 살았다. 의사는 ‘집중을 잘 못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고도 했다. 맞다. 국민학교 6년 내내 통지표에는 ‘주위(선생님들은 주위라 썼다)가 산만하고…’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나는 원래 차분하고 조용한 아이였는지 모른다. 콧구멍에 의식을 지배당하다니.
저학년 시절 엄마는 내 왼쪽인지 오른쪽 가슴에 옷핀으로 하얀 가제 손수건을 달아주셨다. 화장품을 사면 끼워주는 홑겹이나 두겹짜리 손수건이었다. 그걸로 코를 닦거나 풀었다. 가제 손수건이 거칠다 보니 자주 쓰면 코가 헐었다. 아, 이거 무슨 몽실 언니 얘기도 아니고. 그때는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손수건을 달았다.
의사는 코에만 부분마취를 했다. 내 콧구멍에 의료용 정을 들이밀고 의료용 망치를 쳐들었다. 내 눈에는 그냥 공사용으로 보였다. 건강보험 내역을 봤나 보다. 망치를 든 처키 자세로 “한겨레에 다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세상을 비뚤게 보니까 코뼈가 휘지.” 의사는 망치를 내려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가격당한 머리뼈 전체가 진탕하는 속에서도 “그래서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 휘지 않았느냐”고 ‘저항’했다. 수십 차례의 망치질 뒤 의사는 좌파 뼛조각을 떼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두 콧구멍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제 건전한 좌우 균형 인간으로 개조되었나. 피를 보아가며 애써 신념을 지켜냈건만 정작 한겨레에서는 ‘김남일이 성형 중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젠장.
그건 그렇고, 요즘은 가제 손수건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화장솜이 있으니 가제 손수건은 화장용보다는 육아용으로 주로 쓰인다. 하긴 요즘 그거 가슴에 달고 킁킁거리면 왕따는 당첨이다. 그때 내 친구들은 참 착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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