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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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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역대 서울 최고 기온 38.4℃ 기록한 1994년 여름, 폭염의 추억
죽도록 더웠지만 어느새 뜨겁게 그리운 시절, 20대를 보낸 4인의 기억
등록 2012-08-14 18:40 수정 2020-05-03 04:26

태양이 펄펄 끓는다. 비도 오지 않는 2012년의 무더위는 두고두고 1994년과 비교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1994년의 압승이다. 38.4℃라는 1994년 7월24일 서울 최고기온은 아직 경신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 여름을 무엇으로 견뎠나. 당시 더위에 취약한 도시 거주자들은 극장으로 몰렸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 90만 명 안팎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스크린에서는 가, 안방극장에서는 <m>이 더위 난민들을 달랬다. 공지영과 김진명 등 베스트셀러 소설가들을 낳은 여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 서울의 열대야는 14일 동안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20대였던 음악가, 소설가, 기자 등이 18년 전의 더위를 견디고 살아남은 폭염 생존기를 보내왔다. </m>

김일성의 저주 혹은 축복
김인수 밴드 ‘크라잉넛’

1994년 4월 커트 코베인이 죽었다. 그의 자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얼터너티브 록이 주류 록음악으로 자리를 잡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나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대학 2학년. 이때까지도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는 없었지만 이때부터 서울 신촌 등지의 록 클럽과 음악감상실들을 전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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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1994년에 많은 밴드들의 앨범이 쏟아져나왔다. 당시 얼터너티브를 표방한 토마토·뮤탄트·이슈 등의 밴드가 그랬고, 메탈 쪽에서도 데스메탈의 신호탄과도 같았던 크래쉬의 데뷔 앨범, 댄스그룹이 아닌 메탈밴드 터보, 처음으로 코믹한 카피 넘버를 수록한 블랙홀 3집, 그리고 메탈 컴필레이션 앨범 중 최고의 선곡을 보여준 까지 한국 록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좋을 만한 명반들도 쏟아져나왔다.

7월 김일성이 죽었다. ‘김일성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아스팔트가 타들어가는 더위에 어디를 놀러가기도 싫었다. 그저 낙이라곤 커피숍 아르바이트로 번 푼돈으로 주말 즈음 서울 이태원의 라이브클럽 락월드에 공연을 보러가거나 신촌의 음악감상실, 뮤직비디오 감상실에 ‘짱박히기’. 대학 2학년에 맞은 중2병. 친구를 만나기도 싫고 구멍투성이 성적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절망도 없는 그때. 그저 나오는 음악과 스크래치 가득한 뮤직비디오에 감동하고 저녁에는 맥주 한 병으로 공연장에서 헤드뱅잉하고 춤추고, 그러는 동안 밴드들과도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 그 여름의 피서였다. 그러다가 8월 ‘94 우드스톡’이 열렸다. 케이블과 일본 위성방송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방송된 그날의 우드스톡은 커트 코베인의 자살과 더불어 내 음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상업성으로 얼룩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의 록 뮤지션들에게도 그랬으리라. 관객이 던진 진흙에 만신창이가 된 그린데이, 스태프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건반을 부수는 나인인치네일스, 전구인간이 된 레드핫칠리페퍼스, 아직도 보면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블라인드 멜론의 등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 속에 있겠노라 다짐했었다.

1994년 여름, 그 뜨거웠던 폭염은 많은 밴드들을 달구었다. 1995년부터 불어닥친 인디의 폭풍도 사실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행운의 징표
김은형 esc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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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TV에서 반팔 상의를 입고 나오는 남자는 노인들뿐이다. 약속이나 한 건지 젊은 남자배우들은 폭염 속 야외 장면에서도 긴팔에 때로는 카디건까지 걸친다. 멋내다 쪄죽을 참인가. 이것도 참 닮았다. 1994년 그 여름과.

하필 그 여름의 유행은 긴팔 티셔츠였다. 그것도 손목까지 덮는 길이의 티셔츠가 유행했다. 바지 길이는 확 짧아졌다. 남자가 아닌 여자들 사이에서 말이다. 지금의 하의 실종 수준은 아니지만 나는 그해 여름 하면 목은 절반까지 올라오고 팔은 손등을 다 덮는, 통풍도 안 되는 싸구려 재질의 빨간 줄무늬 티셔츠에 흰 반바지를 입고 헐떡거리며 땡볕의 거리를 걷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멋내다 쪄죽겠네, 젠장’ 이러면서 투덜거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때 나는 나름 청순한 22살의 여대생이었으니까.

대학 4학년의 여름방학.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오후 1시30분쯤의 서울 잠실 거리를 걸었다. 2시에 시작하는 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지하철역에서 학원까지 아주 멀지는 않았던 것 같다. 15분 정도? 폭염 속에 영업을 다닌 것도 아니고 건설현장에서 일한 것도 아니니 지옥 같았다고 하기에는 엄살이겠지만 15분 걷는 길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졸업을 앞두고 도대체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한 심정 때문이었다. 학원을 등록했지만 이게 맞는 선택일까,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이 아는 길을 걸으면서도 길을 잃은 듯한 어지러움에 빠지게 했다.

지금 같은 취업난은 아니었다. 1994년은 한국식 거품경제의 막바지였다. 삼성이 대졸 신입 2만 명을 뽑는다는 홍보 포스터가 캠퍼스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다른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채용 규모를 늘렸다. 맘만 먹으면 취직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대기업 취업이 양궁 과녁의 노란색이었다면 그때는 파란색쯤 됐을 터다. 그래도 노랑의 고민이 있으면 파랑의 고민도 있는 법. 이과를 전공해서 나를 빼놓은 과 동기 대부분이 대학원이나 유학을 준비할 때라 취업 정보도 부족했고 함께 고민을 나눌 사람도 없어 외로웠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4년 내 있는 줄 몰랐던 학생상담연구소에도 들락거렸고 결심은 이틀 주기로 왔다리갔다리했다. 아프니까 청춘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시절 나는 헤매니까 청춘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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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91학번이지만 군대를 갔다 와 복학생이 된 남자애들은 1994년 여름이 그토록 덥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취업을 앞둔 1997년이나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쓰나미 앞에서 더 끔찍한 여름을 보냈으리라. 어쩌면 1994년 더위는 마지막 행운의 징표였는지 모르겠다.

1994년 불볕더위가 전국을 달구면서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과 조문 파동으로 여름만큼 뜨거운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던 때이기도 하다. 한겨레 자료

1994년 불볕더위가 전국을 달구면서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과 조문 파동으로 여름만큼 뜨거운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던 때이기도 하다. 한겨레 자료

외롭고 높고 뜨거운
김도연 소설가· 저자)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취직을 하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대학을 다녔으나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 덜컥 교문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 대략 참담했다. 겨울 자취방에 엎드려 악착같이 소설이란 걸 써보았지만 한 끼 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밥을 구하러 공사장을 전전해야만 했다. 소설이란 걸 조금씩 잊어가며. 그렇게 떠돌고 있을 때 경기도 수원에 살고 있는 누나로부터 연락이 왔다. 카페를 열었는데 도와달라는 거였다. 힘든 공사장 일을 하며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당연히 나는 땀 냄새 풀풀 피어나는 짐을 꾸려 수원으로 향했다. 매일 벽돌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게, 소설가가 된다는 게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1994년의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카페 일은 당연히 공사장 일보다 힘들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카페가 문을 닫는 자정이면 나의 다락방으로 돌아가 밤을 새워 소설이란 걸 쓸 수 있었다. 비록 3층집의 계단 끝에 자리한 자그마한 방이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날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여름이면 의당 뜨겁다는 상식은 일찌감치 허물어졌다. 나의 작은 집필실은 찜질방이나 다름없었다. 낮 동안 달아오른 옥상에서 뜨거운 열이 내려왔다. 밖은 집주인의 가족이 수시로 드나드는 계단이라 문을 열어놓을 수도 없었다. 창은 화장실의 창처럼 작았다. 그 방은 세입자를 더 들이기 위해 화장실이나 창고로 쓰이는 곳을 개조한 방이었다. 속옷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5분도 되지 않아 팬티가 축축해졌다. 여름이 가면 바로 가을이고, 나는 계간지 가을호에 응모할 소설을 세 편이나 동시에 쓰고 있던 중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방이었다. 누우면 머리와 발이 거의 벽에 닿는 방이었다. 열대야를 피해 집 주변의 골목골목에는 밤마다 동네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피부의 일부가 돼버린 듯한 셔츠와 팬티를 입은 채 소설을 끄적거렸다.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잠들기 시작할 때면 꼭 어느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거였다. 길고 긴, 새벽의 부부싸움이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내내 그 집에서는 고성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날도 있었다. 덩달아 개들도 짖어댔다. 그러나 나는 그 좁고 무더운 방에서 밤새 소설을 썼다. 욕을 수시로 내뱉으며.

당연히 나는 그때 쓴 소설로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 그 뜨거웠던 수원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 대관령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소설가가 되었다. 대관령의 여름밤은 말할 수 없이 선선하다. 소설을 쓰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그런데… 가끔 수원의 그 뜨거웠던 방이 떠오르는 건 어인 까닭일까.

36.5℃ 인간>38.4℃ 기온
임경선 칼럼니스트· 저자

1994년, 나는 그해 덥지 않았다. 18년 전, 나는 특급호텔의 홍보실에 첫 취업을 했고, 호텔에서 폭염의 계절을 보냈다. 우아하지 못한 여름옷 반팔 소매나 민소매도 노노노, 나는 한여름에도 긴팔의 실크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진주귀걸이를 걸어 호텔리어룩을 완성시켰으며, 앞뒤로 정숙하게 막힌 하이힐을 신고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소리 내며 다녔다. 커리어 인생 중 가장 옷을 잘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다만 겉과 달리 속사정은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입사하자마자 한 달 만에 최종 면접에서 뽑아준 팀장은 회사를 그만두었고, 레임덕 기간의 그녀는 희망에 가득 찬 직장 초년생이 봐서는 안 될 직장의 적나라한 현실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아무리 곧 그만둘 회사라지만 점심시간 즈음에 출근해 매일 다른 기자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비싼 호텔 밥을 공짜로 먹었고, 나를 불러내 일을 인수인계할 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 정치에 대한 겁을 주거나 회사 사람들 뒷담화를 했다. 퇴근 시간 1시간 전에는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조퇴하기도 했다. 제대로 시동 걸기도 전에 직장인이란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기에 충분한 근무환경.

그뿐인가, 그나마 내 위에 있던 팀장이 나가서 새 팀장 오기 전까지 공백이 생기자 순식간에 카오스가 됐다. 같은 팀 또 한 명의 동료는 나이가 자기보다 적지만 위의 직급으로 입사한 나를 견제했고, 무능한 본부장은 도와준답시고 하루에 한 번꼴로 팀 업무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며 닦달했다. 그 와중에 다른 팀의 한 남자 과장은 내가 일본어를 한다는 정보를 주워듣고, 엄연히 자기 업무인 일본어 관련 일을 애매한 이유를 붙여 힘없고 막아줄 사람 없는 신입사원의 자리에 툭 던져놓고 갔다. 한 번은 그냥 해줬지만 점점 더 자기 일을 나에게 밀어넣자 내 마음속 이글이글 끓던 폭염은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겉으로만 우아한 커리어우먼 코스프레였지만 실상은 하루하루가 열 오르는 전쟁.

묵직한 마음으로 발 아픈 하이힐을 질질 끌고 귀가해도 마음이 편히 쉬지 못했다. 당시 나는 생판 모르는 남의 30평대 아파트의 월세 15만원짜리 현관 옆 문간방에 살았다. 싱글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만 집어넣으면 끝인 2평 남짓한 공간. 화장실은 주인집과 같이 써야 해서 제아무리 무더워도 헐벗은 모습으로 돌아다니거나 방문을 열고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호텔 직원식당에서 저녁까지 먹고 늦게 귀가했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고 웬만해선 꼼짝달싹 안 하고 잠을 청해보려 했다. 미니선풍기의 윙윙거리는 소리에 밤새 뒤척뒤척했던 것은 열대야보다 더 무서운 화병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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