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 누리꾼이 올린 김밥 사진에 잠시 포털 게시판이 떠들썩했다. 서울 강남 가로수길에서 팔고 있다는 한 줄에 1만3800원짜리 유기농 김밥 이야기다. 물가를 알려주는 외국의 ‘햄버거 지수’처럼 김밥의 몸값이 그게 그거, 엇비슷한 줄로만 알았는데 천양지차다. 검은 김에 싸인 노동자의 일용할 양식, 김밥의 속내를 들여다보려고 서울을 누볐다.
딱 허기만 가시는 손가락만 한 마약
“하루에 열 다라(대야) 정도 팔아. 다라 하나에 김밥이 몇 개 들어 있느냐고? 그걸 세어봤어야 알지. 200개 좀 넘지 않을까? 얼마나 남느냐고? 아휴, 그것도 뭐 계산해봤어야 알지. 그저 먹고 살 만큼은 벌어. 1인분에 2500원 받는데, 아줌마들 서너 명 일해. 일당 7만원씩 드려. 많이 안 팔리면 수지가 안 맞지. 입소문이 나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주는 덕에 유지해나가는 거야.”
서울 종로구 예지동 광장시장에서 ‘모녀김밥’을 운영하는 유양숙씨의 말이다. 광장시장 먹자골목에 가면 ‘마약김밥’이 있다.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고 손님들이 붙인 이름이다. 40년째 광장시장에 터 잡은 원조집이다. 5월16일 밤 11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가 일곱 차례나 끊겼다. 늦은 시간에도 김밥을 몇 인분씩 사가는 손님들이 계속 이어졌다. 손님들이 마약김밥에 영양학적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리라. 김과 밥에 당근, 단무지, 시금치가 전부인 마약김밥은 지극히 단출하다. 손가락 두 개 굵기에 10cm가량의 김밥 8줄이 1인분이다. 딱 허기만 가실 정도다. 애초에 바쁜 시장 상인이며 제 갈 길 분주한 시장 손님들을 대상으로 팔기 시작한 음식이다.
지금 김밥은 싸고 간편한 식사의 대표 선수다. 파는 김밥 한 줄엔 보통 밥 한 공기(210g)가 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은, 몇백원을 더 내고 아무리 속을 더 키워봐도 한 끼만큼의 허기를 채우기 힘들다. 김밥이 ‘소풍의 맛’을 잃고 국민 패스트푸드로 등극한 것은 1995년 인천 주안동에서 1호점 문을 연 ‘김밥천국’을 중심으로 김밥 프랜차이즈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천원 한 장이면 요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것도 요원해졌다.
서울 마포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10년 넘게 하던 ‘1천원 김밥’ 사업을 2년 전에 접었다. 사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돈을 꽤 벌었기 때문이다. “밤에 식구들과 김밥을 말아서 아침에 마포 사무실 빌딩 앞에서 팔았지. 없어서 못 팔았어. 밤에는 돈을 셀 여력이 없어서 돈상자에 쑤셔넣고 잤다니까. 이젠 그렇게 못해. 단무지다 시금치다 값이 워낙 올라서 2천원은 받아야 하는데 길거리에서 누가 2천원짜리 김밥을 사먹을까.” 지금은 1천원 김밥 덕분에 장만한 슈퍼마켓을 한다.
과연 김밥 가격은 몇 년 새 슬금슬금 올랐다. 서울 분식점에 들어가는 식재료들이 모이는 서울 중앙시장(중구 황학동)을 찾았다. 맛살 1kg 4천원, 단무지 2.8kg 3500원, 양념된 우엉 1kg 9천원, 김 한 톳(100장) 5500원, 햄 1kg 4500원, 달걀 한 판 4천원이다. 여기에 당근 3500원, 시금치 한 단 1천원을 포함해 대략 계산해보니 김밥 한 줄을 싸려면 재료 원가가 645원이다. 1천원에 팔면 인건비도 안 나올 가격이다.
공장 김밥 말고는 이젠 없는 1천원짜리
그럼에도 1천원 김밥은 존재한다. 편의점 GS25는 ‘1000냥 밀어먹는 김밥’을 판다. 보광훼미리마트는 1200원짜리 채소김밥을 판매한다. 보광훼미리마트 간편식품팀 김밥 MD 박소현씨는 “좋은 재료를 대량 직거래하고, 부분적으로 기계를 이용한 반자동화 생산을 통해 전체적인 원가를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시장에는 꼬마김밥을 만드는 작은 도매 공장들이 있다. 30개 단위로 묶어 판다. 이곳에서 만든 김밥은 노점 등에서 보통 3개에 1천원 정도에 파는데, 도매가는 절반 정도 된다. 공장 김밥은 인건비 때문에 기계와 사람 손을 번갈아 거친다. 기계가 정해진 양의 밥을 눌러서 펴고, 재료를 얹어내면 사람이 손으로 김을 만다. 김밥의 공산화다. 음식평론가 황교익씨는 “기계식 김밥 말고 어떻게 1천원짜리 김밥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한밤중에 서울중앙시장에 가면 김밥 재료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곳이 있다고도 일러줬다. “대량으로 만들어서 파는 달걀과 유난히 하얀색을 띤 쌀을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상식을 초월하는 저가 식재료들은 분명히 있는데 문제는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분명한 재료를 써서 손으로 만든 김밥은 없을까. 서울에서 싸고 맛있다는 김밥집 3곳을 찾았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풍년김밥’은 오로지 1500원짜리 김밥 한 품목뿐이다. 달걀, 단무지, 시금치, 당근, 우엉, 맛살로 속을 넣은 김밥은 딱 기본 맛을 낸다. 그날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내 카페 ‘이화사랑’에서 판매되는 참치김밥은 2200원이다. 강문주 지배인은 “들어가는 재료 모두 국산만 사용해 개당 이윤은 많이 남지 않지만 학교 안이라서 고정 고객이 많아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김밥’은 다른 메뉴 없이 여러 종류의 김밥만 판다. 가격대는 1500~3천원이다. 입소문이 나서 손님이 많고, 300~400줄씩 단체 주문도 자주 들어온다. 이들이 저렴한 공장식 김밥에 맞서는 방법은 손맛과 박리다매뿐이다.
지난해부터 길거리 음식에 프리미엄 바람이 불어 김밥도 고급화됐다. 고급스러운 길거리 음식을 판매하겠다는 전략을 내건 ‘스쿨푸드’의 김밥 ‘마리’의 가격은 6500원부터 시작한다. 김밥 한 줄보다는 조금 양이 많다. 날치알, 통새우, 고추멸치를 넣은 김밥 모양새가 다르지만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이인 마케팅팀장은 “보통 김밥은 최대한 많은 재료를 넣으려고 꾹꾹 눌러 단단하게 싸는데 이곳의 김밥은 밥에 마요네즈가 들어간 특제 소스를 뿌리고 살살 말아서 내도록 한다”고 말했다. 김밥 마는 방법을 햄버거처럼 표준화할 수 있을까? 김밥 만드는 직원들은 처음엔 김밥에 들어가는 밥과 속재료들을 정확하게 쥐는 훈련을 거친다. 몇g 단위까지 정확해야 한단다. 그다음에는 김밥을 말 때 손의 힘이 적당히 들어가도록 연습한다. 그래야 일본의 초밥 만화 같은 곳에서 보는 쌀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김밥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직원 교육 담당자는 “김밥이 가장 까다롭다. 직원들이 김밥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데 보통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했다. 김밥을 만드는 직원 중에서도 달인이 있다. 김밥 한 줄을 마는 데 보통 4분이 걸리지만 56초 최고 기록도 있단다. 500명 중에 단 2명. 규격화된 김밥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밥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1만5천원짜리 김밥의 밥은 한 줌
이들이 이렇게 ‘김밥 노동’을 표준화하는 이유는 시장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인 팀장은 “2012년 전국 분식업 시장 규모는 연 7천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스쿨푸드의 전체 매출에서 김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25%를 넘는다. 가장 주력하고 있는 메뉴다”라고 말했다.
이제 1만원을 넘는 유기농 김밥을 찾아서 강을 건널 차례다. 그러고 보니 이전부터 강남의 ‘김밥 지수’는 강북과는 달랐다. 강남에도 저렴한 김밥을 파는 프랜차이즈가 많지만, 4천원을 넘는 김밥집도 심심찮게 보인다. 오랜 단골이 많기로 소문난 강남의 한 백화점 지하에서 파는 김밥은 3500~9천원이다. 또 다른 강남 지하상가 가게의 김밥은 4천원대다. 재료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전부 국산이 아니더라도 원산지는 분명한 편이다. 신선도를 지키려고 만든 지 2시간 내에 안 팔리면 폐기한다고 했다.
지난 5월1일에는 서울 압구정동에 김밥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 ‘킴팝’이 문을 열었다. 여기에선 가장 싼 김밥이 5천원, 가장 비싼 김밥은 1만5천원이다. 이렇게 값이 비싼 이유를 주인에게 물었더니 “전적으로 식재료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킴팝의 한쪽 벽에는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들의 원산지를 크게 써두었다. 유기농 인증서도 붙어 있었다. 전북 무안의 양파, 선동(선상에서 잡은 즉시 급냉한 것) 오징어, 타이거새우, 전남 신안의 천일염을 사용한다. 1만원짜리 김밥을 사보았다. 밥은 아주 적고 베이컨, 오징어튀김, 커틀릿까지 속재료가 풍성했다. 무엇보다 설탕이나 소금 같은 양념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 손승한씨는 “탄수화물을 줄이려고 밥은 한 줌만 넣는다. 튀김에는 구운 양파를 넣고, 양념하거나 볶지 않은 생오이만 쓴다. 세척 당근이나 채썬 우엉조차 사지 않았다. 좋은 재료들의 맛이 잘 어울리는 김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보통 식재료는 음식값의 30~40%를 차지한다. 손씨는 1만원짜리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비가 4천원을 넘는다고 했다. 그런데 2주일 정도 장사를 해보니 하루 매출이 50만원으로, 1만원을 넘는 비싼 김밥을 좋아하는 손님도 의외로 많았다. 1만5천원 김밥에 대한 음식평론가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황교익씨는 “식재료 가격은 기껏해야 몇천원 차이다. 가격 차이보다는 좋은 것을 고르는 눈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전히 급하게 한 끼를 떼운다면
알면 알수록 정체가 불분명해지는 김밥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다. 킴팝 주인 손씨는 “간편한 김밥 재료라며 파는 공장식 재료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급한 한 끼를 채우려고 김밥을 산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ㅊ김밥을 운영하는 고아무개씨도 김밥을 판다. 볶음밥과 찌개 등을 판매하는 이 가게에서 김밥은 가장 값이 싼 음식이다. 1500원짜리 김밥 한 줄을 팔면 500원 조금 넘게 이윤이 남는다고 한다. 그다지 목이 좋지 않은 가게에서 한 줄이라도 더 팔려면 고된 노동이 뒤따라야 한다. 고씨는 아침 8시 무렵에 문을 열고 밤 9~10시에 문을 닫는다. 고단한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일하는 노동자의 김밥을 사먹는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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