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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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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잭슨과 포식자의 민망한 결제

입에서 살살 녹는 초밥집 서울 구로 ‘은행골’
등록 2012-05-23 22:26 수정 2020-05-03 04:26

가로수길은 여전히 화사했다. 아시아 푸드 전문식당 생어거스틴에 도착한 얼굴 벌건 우리는 우아하게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와잎은 익숙한 솜씨로 주문했다. 현지인이구만.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몇 번의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늘 현지인으로 오해받은 와잎이었다. 이윽고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인 나시고렝, 작은 게를 튀겨 커리와 함께 먹는 뿌팟봉커리, 베트남식 볶음면인 퍼싸오와 함께 새뮤얼애덤스 두 병이 딸려나왔다. 술 먹다 허기졌던 난 포식자처럼 음식을 빨아들였다. 와잎이 말했다. “짜장면 먹듯이 먹는구만~ 밥 안 먹었니?” 난 듣는 척도 안 하고 계속 흡입했다. 와잎은 안주는 안 먹고 줄창 술만 먹었다. “현지인처럼 밥 좀 먹으면 안 되니? 여기 술값 비싸더만.” 와잎은 생일날까지 그놈의 돈타령이냐며 눈을 희번덕 떴다. 생일은 내일 아니니? 그럼 국산 맥주로 바꿔먹으면 안 되겠니? 내 말을 개무시한 와잎은 “내일 생일인데 선물도 카드도 없고 이게 뭐냐”고 으르렁댔다. 난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래 마셔라 마셔. 와잎은 진하고 깊은 맛의 새뮤얼애덤스를 맛있다며 잘도 마셨다. 아주 얼굴 까만 새뮤얼 잭슨이구만~.

잘 차려입고 엘레강스하게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는 손님들 사이로 술 먹는 와잎과 밥 먹는 남편이 앉아 있었다. 빈속에 섞어마셨기 때문일까. 와잎은 느닷없이 취해버렸다.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숙면을 취하는 와잎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몇 번이나 속삭였지만, 와잎의 정신줄은 남중국해를 건너고 있었다. 음식은 아직도 많았다. 버리고 가긴 돈이 아까웠다. 싸달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있어 보였다. 널브러져 있는 와잎을 앞에 두고 난 이를 갈며 나시고렝을 구겨넣었다. 님아~ 이럴 거면 조금만 시키지~.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뻗어 있고 남자는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나라도 봤으면, 웬 상또라이 커플이냐고 했을 터. 목구멍까지 음식이 찼다. 누가 말 걸면 그 면상에 부어버릴 태세로 와잎을 부축하고 결제를 하는데, 마치 모텔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문득 들었다. 직원과 서로 민망해 얼굴을 못 보는.

집에 온 와잎은 그대로 뻗어버렸다. 아들 녀석은 장모님과 잠들어 있었다. 난 속이 더부룩해 잠도 안 왔다. 다음날 아침, 와잎이 말했다. “어제 그 집 맛있지? 다음에 또 가자~.” 참 눈물겹게 맛있더라. 다음에 너 혼자 가라~. 와잎은 어제의 추태는 나 몰라라 하며 식전 댓바람부터 선물 타령이었다. 그러더니 자기 선물은 자기가 알아서 살 테니 갑자기 초밥이 먹고 싶다 했다. 니 선물 사는 카드는 내 카드 아니니? 갑자기 먹고 싶은 것도 잘도 생각나는구나. 그날 저녁, 와잎의 타령 끝에 결국 맛 좋은 초밥으로 유명한 ‘은행골’ 구로 본점으로 향했다. 와잎이 모둠초밥과 참치회인 가마도로를 시키며 말했다. “오늘 내 생일이니까 한 잔 먹어도 되지?” 니 생일은 매일이니? 그리고 와잎아~. 소주는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거야~.

회는 도톰했고, 밥은 차졌다. 참치회는 살살 녹는데 와잎이 소맥을 위해 맥주를 시켰다. “좀 엔간히 먹으면 안 될까?” 같이 온 아들 녀석이 갑자기 내 말을 꺾었다. “까부리~. 까부리~.” 난 소주를 마시며 절규했다. “그러지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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