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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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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땅바닥에 수없이 머리박기도 하는 것

태권도 사범 최윤수와 마리엘렌이 위기 없이 사는 법
등록 2012-05-23 20:09 수정 2020-05-03 04:26
최윤수, 마리엘렌 부부가 생각하는 사랑은 ‘나의 바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희망’을 읽어내는 것이다. 아들 미카엘, 딸 스텔라과 함께한 부부. 최윤수·마리엘렌 제공

최윤수, 마리엘렌 부부가 생각하는 사랑은 ‘나의 바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희망’을 읽어내는 것이다. 아들 미카엘, 딸 스텔라과 함께한 부부. 최윤수·마리엘렌 제공

프랑스 파리 중심의 한 교회. 훤칠한 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미녀가 햇살 아래로 걸어나왔다. 촘촘한 레이스 장식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노랑색 장미 부케를 들었다. 곁에는 까만 생머리, 날카로운 눈매, 다부진 체격의 동양 남자가 검정색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하객들은 쌀을 던지며(다산과 부를 기원하는 유럽의 결혼식 풍습) 환호했고, 리본과 꽃으로 장식한 웨딩카가 등장할 차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디선가 희한한 탈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나타나 춤판을 벌이는 게 아닌가. 어느새 연지 곤지에 족두리를 쓴 서양 신부와 사모관대를 갖춰입은 동양 신랑이 춤꾼들에 둘러싸였고, 그들은 영화 촬영인 줄로 오해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 전통에 따라 한 번 더 결혼식을 올렸다.

23년 전, 태권도 사범인 최윤수와 그의 아내 마리엘렌이 결혼하던 날의 풍경이다. 대학에서 만난 그들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탈춤 동아리의 회원이었고, 동아리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런 결혼식을 치렀다. 인터뷰를 위해 그들 아파트를 찾았다. 원래는 부부 인터뷰를 청했는데 어쩌다 보니 큰아들 미카엘 최영과 차녀 스텔라 최선도 참여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상황은 우연이 아니었다. 최윤수 사범의 집에서 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부부가 생각하는 사랑은 ‘나의 바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희망’을 읽어내는 것, 행복을 유지하는 조건은 ‘차이에 대한 존중’,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은 ‘대화’이기 때문이다.

최윤수는 경북 구미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서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은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파리3대학 연극학과에 편입했다. 마리엘렌은 법대를 졸업하고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파리3대학을 다시 다녔는데 그 무렵 최윤수를 만났다. 지금은 영화 프로덕션에서 일하고 있다. 과연 두 사람은 서로의 어떤 면에 반하게 되었을까.

부부의 결혼식 사진.

부부의 결혼식 사진.

“프랑스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기 원하죠. 그러니 각자의 생활을 즐겁게 하고, 저녁이면 서로의 삶을 나누고, 공통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지만 서로 다른 점은 존중해주고… 2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여전히 데이트하는 기분입니다.”

“남녀가 만나 함께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잘 살기보다 잘 못 사는 경우가 더 많을걸요? 이혼하지 않았다고 다 사이좋게 사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모든 관계에는 해법이 있지요. 바로 대화입니다.”

최윤수의 말에 따르면, 마리엘렌은 귀찮을 정도로 많은 질문을 해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마음을 열었고 부부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아이들과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뷰 중 미카엘이 한국 문화를 이해 못하는 이탈리아인 여자친구와, 어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도록 강요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마리엘렌은 웃음 띤 얼굴로 끝까지 듣고 나서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가 볼에 키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사법일 뿐이야. 여자친구에게 그 점을 이해시켜주면 어떨까? 널 사랑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땅바닥에 고개를 수없이 박은 적도 있는걸.(그녀가 언급한 그 사건(?)은 바로 폐백을 말했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중에 단 한 번도 위기가 없었다. 미카엘과 스텔라에겐 최고의 대화 친구가 부모다. 특히 엄마와 딸 사이에 비밀이라곤 없다. 심지어 남자친구와의 은밀한 고민까지 엄마는 모두 듣고 이해해줄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해법까지 제시한다.

“부모는 자식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켜보다가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너무 집착하면 아이들은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고,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 되니까요. 단, 살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차이’를 인정하는 법은 가르쳐야지요. 그리고 연애나 결혼의 상대로는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낭만이고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시기인데, 사랑을 위해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결혼하지 않으면 얼마나 그 인생이 불행할까요?”

촘촘하게 짜인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이 가족은 어떻게 그런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일까? 부부라는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있지만 각기 다른 생각과 꿈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사랑의 강이 흐르게 하는 비법은 아마 솔직하고 깊은 대화인가 보다. 당신의 가족은 과연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진짜 대화법을 알고 있는지?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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