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직업군 중에서도 특히 운동선수들이 결혼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동성끼리 운동만 하느라 이성을 사귀거나 연애에 빠져본 경험이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한눈에 반해 결혼하기는 쉽지만,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쉽게 결별한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운동선수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물론 일찌감치 이성에 눈떠 학생 때부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까지 이어지는 공부에 치여 제대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볼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연애를 감정의 낭비라 생각하고 오히려 귀찮아하는 것이 요즘 청춘들의 실태라고 한다.
누군가는 ‘인스턴트 사랑’이라 부르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세태의 표상으로 여전히 ‘동거’를 바라본다. 하지만 두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아보거나 장기간의 여행을 하며 서로를 세심하게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면 이혼율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순진한 발상일까.
유쾌한 아가씨 장세진씨와 캐나다가 국적인 세바스찬은 울산에 있는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처음 만났다. 한 사람은 캐나다에서 파견된 엔지니어로, 한 사람은 기술통역요원으로. 이미 외국인과 사귀어본 경험이 있던 세진씨는 연애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세바스찬과 동거를 시작했고, 6개월 뒤에는 캐나다로 귀국하는 그를 따라 장기간의 여행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두 달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서 중국, 티베트, 네팔, 인도, 독일, 아이슬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하는 35일간의 여행이었다.
발전소에서 근무할 때는 12시간 내내 붙어 있어야 하는 환경이었기에 대인관계나 일하는 방식, 힘든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 등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모습일 뿐, 상대방의 진짜 매력이나 단점은 같이 한 공간에서 살아봐야만 보이는 법이다. 베이글 만들기, 고양이 똥 치우기, 침대 시트 갈기 등 자잘한 집안일 분담을 하나하나 의논해 결정하고, 음식 취향이나 씻는 습관, 식탁에서의 태도 등을 관찰해 나쁜 버릇을 고쳐나갔다. 육체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처음엔 달라서 당황스러웠지만 서로에게 맞춰나가며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진씨만큼은 세바스찬과 결혼을 하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아이슬란드의 양떼가 풀을 뜯는 들판에서 세바스찬은 양말 속에 숨겨둔 반지를 꺼내 무릎을 꿇고 세진씨에게 청혼했고, 캐나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법적 절차를 밟기로 했다. 우연히 세바스찬이 고환암이라는 것을 발견해서 바로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데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형식이나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연인들답게, 오히려 ‘자식을 이만큼 키웠으니 이젠 해방되셔도 좋습니다’라는 의미의 ‘부모 졸업식’ 같은 의미로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렀다.
“저는 결혼이 남녀 사이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보지 않아요. 사랑하니까 결혼할 수는 있지만, 결혼이 사랑을 맺어줄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결혼을 ‘인륜지대사’로 여기면서도 정작 앞으로 함께 살아갈 두 남녀 간의 정신적·육체적 합일과 조화보다는, 형식적 절차나 남의 눈에 보이는 부분에만 더 치중해 일회용 행사로 마무리하려는 것이 우리의 결혼문화다. 또한 아직까지도 다 큰 자식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못 미더워해서, 독립은커녕 결혼 과정까지 세세하게 참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현실 아닌가. 세진씨와 세바스찬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단단한 자존감, 자식의 결정을 지켜보며 열렬히 지지해주는 부모의 신뢰가 있다면, 누구나 엇비슷하게 하고 있는 우리네 사랑과 결혼 풍경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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