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에 나온 한 편의 로맨스영화가 여자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Before Sunrise). 파리행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녀가 대화를 나누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걸 알고 즉흥적으로 ‘비엔나’에서 내린다. 하루 동안 그 도시의 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랑의 감정을 느낀 두 사람은, 6개월 뒤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어설픈 약속을 하며 애틋하게 헤어진다. 우리 눈에는 같은 백인으로만 보이지만 에단 호크가 분한 제시는 미국인, 줄리 델피가 분한 셀린느는 프랑스인이니 그들 역시 국제연애를 한 셈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사랑을 하는 데 비슷한 점이 많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서로 달라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나을까 곰곰이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국제결혼을 선택하는 커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주로 후자에 속해서,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에서 자라난 서로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친해질수록 호기심은 서서히 비슷함으로 덮이는 법이다. 그렇다면 한국 여성이 처음 외국인과 데이트를 하거나 국제결혼을 택할 때 상대방인 외국인 남성에게 제일 많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유교적 전통문화와 가부장적 가풍에서 자란 한국 남성들이 여전히 잘 못하는 건 바로 감정 표현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마음은 꼭 뭔가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하거나 목놓아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도 그런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닌데, 특히나 한국 남성들은 사랑의 디테일에 취약한 편이다.
카타르항공의 승무원이던 박은옥씨는 동기 언니의 소개로 독일인 마티아스 카일을 처음 만났다. 숫기 없고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 은옥씨였기에 활달한 친구 여럿과 함께 모임에 나갔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제시와 셀린느처럼 기차 속 우연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이국적인 문화에 불꽃 튀는 대화가 이어진 점에선 영화와 다를 바 없다. 독일에 있는 남녀 혼탕 사우나라든지, 공중파 텔레비전에서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여성의 상반신이 그대로 노출되는 등 독일의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은옥씨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의 강제적인 회식 문화라든가 고부갈등 문제, 한국에만 있는 산후조리원 등은 마티아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양가에 결혼을 허락받는 과정도 너무 달랐다. 외국인 사위에 부정적인 은옥씨 부모님을 만나러 가며 마티아스는 절하는 법, 식사하는 법, 인사 예절 등을 철저히 예습했고 그런 노력을 은옥씨 부모님이 가상히 여겨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반면 마티아스의 부모님은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한 대형 태극기를 집 밖에 걸어놓고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양인인 은옥씨를 따뜻하게 환대해주었다.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음에도 두 사람을 확실히 이어준 다리가 된 것은 바로 시도 때도 없는 ‘사랑 표현’이다. 심지어 두 사람은 여전히 제3국의 언어인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느끼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못한다. 마티아스는 한결같이 자상한 애정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도 제일 먼저 하는 게 “사랑한다”는 말이다. 마음은 있어도 표현에 약했던 한국 여성 은옥씨도 그의 다정다감함과 극진한 배려에 한여름 햇빛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마음이 녹아버렸다.
3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 지 이제 만 2년, 두 사람은 현재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국제도시 두바이에서 첫 아기가 태어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고 있다(은옥씨는 임신 7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차이점보다 닮은점이 더 많아진 두 사람.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아쉬운 추억 속의 사랑이 아닌 현실에서 사랑을 이뤄가는 그들에게는 남에게 미처 다 말하지 못할 사건이나 굴곡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딛고 올라 행복한 현재를 만들어낸 이 커플을 보며 느끼는 ‘사랑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 있다. 밤낮없이 반복되는 사소한 고백만큼 ‘사랑’이라는 성을 쌓는 데 꼭 필요한 튼튼한 벽돌은 없다는 것이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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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레자망’ 연재를 이번호로 끝냅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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