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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레폴레’, 기적을 만들다

케냐 사람 크리스틴의 극진한 보살핌에 감동한 리치의 아버지 “어서 결혼하거라”
등록 2012-06-19 11:12 수정 2020-05-02 19:26
만난 지 10년이 됐지만, 크리스틴(왼쪽)과 리치는 여전히 닭살 커플이다. 크리스틴&리치 제공

만난 지 10년이 됐지만, 크리스틴(왼쪽)과 리치는 여전히 닭살 커플이다. 크리스틴&리치 제공

“기적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후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 몸에서 암덩어리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어머니가 잠시 비틀거렸다. 어머니는 곧 병실 한쪽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리치가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말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가 힘겹게 입을 여셨다.

“너희 둘, 어서 결혼하거라.”

그제야 숨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크리스틴이 큰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결혼을 반대하는 예비 시아버지의 병실을 잠시도 떠나지 않던 그녀였다. 마침 그 병원 암센터의 매니저로 일하던 크리스틴은 병원 내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최고의 진료를 받으실 수 있게 도왔고, 밤이면 새우잠을 자며 아버지 곁을 지켰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가 낯선 언어로 고통을 호소할 때 혹여 알아듣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한국어도 배웠다. 간병인으로, 딸로, 신앙인으로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극진한 마음과 정성을 다했고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리치는 원래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대학을 다녔는데, 군 생활 이후 원인을 알수 없는 통증에 시달려 취업은커녕 학업도 계속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를 맞았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별 효과가 없어 고민하던 중 신경척추의학 전문의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거짓말처럼 예전 모습을 되찾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아주 애틀랜타대학에서 신경척추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수렁에서 건져준 신비로운 의학에의 도전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그 무렵, 그는 수업 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하고 성실한 태도로 공부하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도움을 청하는 그에게 세상 가장 너그러운 얼굴로 모든 자료를 선뜻 내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인내심,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남을 위해 행동하고 배려하는 친절함, 진심으로 웃고 울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의 그녀를 리치는 곧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은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리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멀고 먼 땅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은 아마 상상조차 해본 적 없으리라.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피붙이 이상으로 정성을 쏟는 크리스틴의 모습을 보며 삶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케냐와 한국의 전통을 반반 섞은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지금 충남 천안에 살고 있다. 이제는 크리스틴을 딸처럼 대해주는 시부모님도 곁에 있고, 올해 말이면 첫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케냐 역시 가족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는데다 두 사람의 성향이 비슷하고 크리스틴이 한국어를 열심히 배운 덕에 부부 사이의 갈등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아프리카의 영혼을 타고났기 때문인지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춤을 출 정도로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다. 언어 차이 때문에 오해가 생길 때면 짜증 대신 웃음보가 먼저 터져나온다니 이런 찰떡궁합이 또 있을까? 연애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만난 지 벌써 10년. 그러나 리치와 크리스틴은 잠시도 쉬지 않고 등을 토닥이거나 손가락을 조몰락거리며 애정을 표현하는 닭살 커플이다. 그런데 행복한 이들을 간혹 괴롭히는 일들이 있다. 우선,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케냐의 ‘폴레폴레’(스와힐리어로 ‘천천히’라는 뜻) 문화가 부딪힐 때다. 한국에선 뭐든 서둘러야 하는 반면, 케냐에서는 무슨 일이든 급하면 복이 달아난다며 사람들이 폴레포레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크리스틴을 보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는 일도 참기 어렵다. 아무리 긍정적인 그녀이지만 부당한 차별과 편견은 상처가 된다.

“한국인들이 다양한 문화에 좀더 노출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요. 다른 문화 혹은 인종의 사람을 접했을 때 지나친 호기심이나 적대감을 갖는 대신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살아온 나라의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를지언정 그들의 꿈은 하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꿈. 그것을 이루려면 감당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사랑으로 이미 기적을 일궈낸 그들에게 하지 못할 일이란 게 과연 있을까 싶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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