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는 종종 이런 가정을 한다. 또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가? 어떤 일을 되돌리고 싶은가? 상상과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은 누구나 딱 하나의 인생을 선물받고 이 땅에 태어난다.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에 응답하지 않고 남들 따라하며 가짜 인생을 빚다 보면 언젠가는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오지 않을까? 자기만의 철학과 주관에 따라 사는 일은 왜 그리도 어려운 걸까?
이런 자책 아닌 자책에도 불구하고 해보게 되는 생각.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결혼은 어떨까?
여름을 맞은 지중해 키프로스섬의 어느 해 질 녘 오후, 이름 모를 언덕 위에는 오로지 가족의 손으로 꾸민 소박한 결혼식장이 신랑·신부를 기다린다. 노을을 배경으로 리본과 꽃 몇 송이로 장식한 테이블 하나가 있고, 그 위에는 샴페인이 놓였다. 과감하게 무릎 아래 부분을 잘라내어 한층 경쾌해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캐주얼한 바지에 단추 하나를 풀어 편안해 보이는 셔츠를 입은 신랑이 손을 잡고 함께 등장한다. 결혼식 참석 인원은 신랑·신부를 포함해 총 11명. 양가 직계가족뿐이다. 주례나 사회, 들러리가 없는 결혼식이지만 모든 진행이 매끄럽다. 신랑·신부는 서로 마주 보고 각자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감회와 다짐을 적은 서약서를 읽은 다음 반지를 교환한다. 처음 보는 악단의 형식적인 음악 대신 파도와 바람 소리, 새들의 노랫소리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감격한 양가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시고 사진사를 자청한 아버지들은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샴페인을 터뜨리고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 저녁을 먹고 라이브 음악에 맞춰 밤새 축하연을 즐긴다.
제아무리 화려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호텔이라도 이토록 로맨틱할 수 있을까?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붉은 태양을 독차지한 채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며 나누는 키스까지! 얼핏 들으면 수많은 여성들의 꿈속에나 존재하는, 지나치게 완벽한 결혼식이다. 그러나 배 아프게도 이것은 내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펭귄(이번 사연 주인공의 필명.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본명은 밝히지 않는다)과 메브의 실제 결혼 이야기다.
펭귄은 대학 시절 이미 ‘남들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용감한 선택을 한 한국 여성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만화를 그릴 때 더 큰 기쁨을 느낀 그녀는 과감히 대학을 그만두었다. 학벌과 스펙에 목숨 거는 요즘 세태를 생각할 때 웬만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엔 큰 동요가 없었다.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남들의 우려보다는 현실 속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훨씬 더 중요했다. 메브와 연애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화가 펭귄은 다양한 소재를 찾으려고 인터넷상에서 낯선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고, 어느 날 그를 알게 되었다. 영국 사람인 메브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태권도에 심취해 한국에 와 살며 태권도 사범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었다. 확고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두 젊은이는 사랑에 빠졌고 천천히 그 사랑은 단단해졌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순수한 사랑을 왜곡해 공격적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길을 걷는데 대뜸 욕을 하거나 호통을 치는 사람, 넌지시 명함을 건네며 ‘한국 남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황당한 제안을 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펭귄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랑을 선택했다. 타인의 기준이나 사회적 통념이 걸림돌이 되도록 내버려둘 그녀가 아니었다.
“전에는 활활 타오르다 식어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랫동안 ‘아, 따뜻해’라고 느껴지는 것이 사랑인 걸 배웠죠. 소중한 진리를 알게 된 이상 이 사랑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확신을 주는 사랑은 삶의 원동력이니까요.”
인생은 출발점도 도착점도 남과 다른 ‘나만의 마라톤’이다. 그러니 손을 맞잡고 같은 코스를 달릴 ‘짝’을 만난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삶의 기적을 함께 만들 파트너가 된 펭귄과 메브. 앞으로 그들이 마주하게 될 경이로운 풍경과 사건들은 어떤 모습일까? 때로는 힘겨운 오르막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들에겐 ‘다시 태어난다면?’ 하는 가정 따위는 필요 없지 않을까?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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