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을 불문하고 이왕이면 낭만적인 애인을 원하는 여성이 많지 않을까. 그런데 특이하게도 남자친구가 너무 낭만적이지 않기를 바랐다는 아가씨가 있다. “완벽한 남자가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들어버리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마리 오토(29). 통역전문회사 매니저, 화려한 스펙과 외모, 이른바 ‘엄친아’인 그녀가 안영빈(35)씨를 만난 건 베를린의 한식당에서였다. 영화광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한국 영화를 섭렵해왔고, 한국 문화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식당에 갔다가 안씨를 알게 되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안영빈씨는 독일 베를린으로 출장길에 올랐다가 우연히 사업 제안을 받았다. 꼼틀대는 호기심과 역마살을 이기지 못해 독일에서 새 삶을 시작했을 때 사랑이 찾아왔다.
밤낮없이 온라인 대화를 나누던 둘은 먼 땅에서 태어나 살아온 남녀가 그토록 비슷한 감성과 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드디어 첫 데이트! 영빈은 마리를 집으로 초대해 한국식 저녁상을 차려주었다. 얼마 뒤 그녀도 슈니첼(Schnitzel·독일식 돈까스)을 만들어 그를 대접했다. 그 어떤 고급 식당에서의 데이트보다 마음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식사 뒤 어렵게 발걸음을 떼는 영빈에게 그녀가 말했다. “꼭 막차를 탈 필요는 없어. 내일 첫차도 있으니까.”
밀고 당김 없이 쿨하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그들은 다음날부터 두 집을 옮겨가며 밤을 새우다가 약 8개월 뒤 살림을 합쳐버렸다. 이 커플이 함께 사는 방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의료보험과 세금은 각자, 생활비는 반씩 분담하고 쇼핑과 요리는 영빈, 세탁과 청소는 마리가 책임진다. 마리는 지난겨울 우리 돈 5천원을 주고 산 빈티지 코트를 가장 즐겨 입었고, 두 사람은 주말마다 벼룩시장에서 살림 사는 재미에 폭 빠졌다. 베를린 연인들의 생활 속엔 사치나 허세가 없다. 해외 체류 경험 덕에 편견이 없는 영빈, 베를린 특유의 세계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마리. 열린 가슴의 남녀는 국경과 언어 따위는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는 데도 동의한다. 영빈보다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하는 마리는 김치 마니아다. ‘오빠’와 ‘이뿐이’라는 애칭이 왠지 낯설지 않다. 독일에 살지만 사랑한단 말은 꼭 한국어로 속삭인다.
그런 마리에게 한가지 문화 충격이 있는데, 한국의 결혼식이었다. 독일에선 대개 시청에서 결혼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평생 추억을 나눌 친구들만 불러 조촐한 파티를 한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호화로운 호텔에 500명도 넘는 하객이 몰렸다. 사람이 붐벼 신랑·신부를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것, 낯선 이들과 마주 앉아 초고속으로 밥을 먹고 나온 그 행사가 수천만원짜리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경악했다.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결혼식인가?
독일에선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지 오래다. 최근 베를린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30%는 미혼모 자녀다.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결코 부끄럽거나 잘못된 일도 아니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같이한다. ‘어떻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부터 낳아?’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면, ‘사랑하는 사이에 아이 낳는 것이 뭐가 잘못이지? 함께 살아보기도 전에 결혼하는 것이야 말로 어떻게 가능한 거지?’라는 것이 그들 생각이다. 영빈과 마리는 지금 결혼보다 같이 살며 서로를 깊게 알아가길 원한다. 그러다 아기가 생기면 기쁘게 세상으로 맞이하고, 두 사람의 하나됨을 축하받고 싶을 때 결혼식도 올릴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모든 것을 겉치레 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나가고 싶다는 거다.
분수에 맞는 결혼과 미래 설계 대신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결혼식을 치르느라 허니문이 지나면 ‘비터문’만 남는 게 한국의 결혼 현실은 아닌지. 내 인생의 가치관을 공유할 짝 대신 남들 앞에 체면을 세워줄 이력의 소유자를 찾아 한 침대를 쓰는 오류를 범하는 게 일부 한국인들의 슬픈 선택은 아닐는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국 사회의 변질된 결혼문화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이들처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계야말로 오래도록 진짜 낭만을 지속할 수 있는 명품 사랑법일지 모른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