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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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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초 만에 찾은 운명

첫눈에 반한 사랑, 순수한 열정이 닮은 김은선씨와 스티븐 리비에르의 직감과 본능의 화학 작용은 현재 진행형
등록 2012-04-14 01:41 수정 2020-05-02 19:26

첫눈에 반한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빨리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의미할까?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녀가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끼게 될지는 불과 0.13초 안에 결정된다. 또한 ‘직감적이고 본능적인 호르몬의 화학작용’이 공통 관심사나 이성적 판단보다 더 강력하게 관계를 지배한다. 그렇다면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3년 전, 미국인 스티븐 리비에르는 퇴근 뒤 혼자 단골 맥줏집에 들렀다. 잠시 뒤 젊은 여성 몇이 들어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무심히 고개를 돌렸던 그는 한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텐더에게 부탁해 맥주를 가져다준 다음 용기를 내어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날 저녁, 김은선씨는 울적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 손에 이끌려간 술집에서 우울한 기분을 떨치려 애썼다. 그런데 우연히 합석한 낯선 남자의 유창한 한국어와 유머감각 덕에 저녁 내내 웃고 말았다. 은선씨는 괴로운 일을 잊게 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두 사람 사이에는 강렬한 화학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인인 스티븐은 올해로 한국 생활 17년차에 접어들었다. 대학 졸업 뒤 떠난 유럽 여행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는데, 마침 서울에서 영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잠시 머물 생각이었지만 이내 한국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연세대학교의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석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제2의 고향’ 한국에 더 머물며 의미 있는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창간한 는 서울의 이모저모를 알리는 영문 잡지다. 고비도 많았지만 이제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 사이에 꽤 인기가 있다. 은선씨는 그런 스티븐의 순수한 열정에 반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라이크 어트랙 라이크’(Like-attracts-like·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이에게 끌린다는 이론)의 결과일까? 은선씨도 보기 드문 ‘순수녀’에 ‘열정적 여성’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은선씨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망하던 대로 간호사가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행복했던 그녀에게는 외국에 나가거나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호기심도 없었다. 미국인과의 결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랑은 2년간의 연애로 이어졌고, 더 이상 떨어져 지내기 싫어 결혼을 결심했다. 사윗감이 미국인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은 어머니는 조용히 밥숟가락을 놓고 방으로 들어가버리셨다. 그러나 막상 스티븐을 보신 뒤엔 부모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은선씨 부모님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스티븐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크게 점수를 땄다. 이번엔 은선씨의 차례. 미국행에 오른 그녀는 예비 시부모를 만날 생각에 긴장했지만 스티븐의 부모님은 오히려 귀한 손님 대접을 해주셨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하던 중, ‘빅서’라는 해변에 스티븐이 차를 멈추었다. 기막힌 절경을 앞에 두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반지를 꺼내 들었다. “은선씨, 나와 결혼해주겠어요?”

두 사람이 꿈꾸던 결혼의 유일한 조건은 야외 결혼식. 스티븐 지인의 호텔 옥상을 빌려 꽃으로 장식하고 하객 100여 명을 초대했다. 식이 끝난 뒤 하객들은 재즈밴드의 연주와 사회자의 입담이 이어진 피로연을 오래오래 즐겼다. 은선씨는 혼수가 100% 생략됐기에 부모님이 약간 서운해하셨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알짜배기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는 누구보다 흡족해하셨다. ‘우리 스 서방!’이라며 사위 사랑에 열을 올리는 장모는 갈비찜부터 도가니탕까지 손수 만들어 저녁을 차려주신다. 녹갈색 눈의 미국 사위는 장인어른과 술 한잔을 하고 함께 누워 TV를 볼 정도로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소소한 행복은 결코 허례허식을 갖춘 결혼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두 사람은 절실히 느끼고 있다.

“행복한 인생의 시작인 결혼식에 주인공들의 사랑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그들의 작은 아파트에는 열정적인 두 사람의 인생이 ‘모닝 허그’로 시작해 ‘굿나잇 키스’로 끝나는 일상에 버무려져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연애 2년 결혼 1년차, 만난 지 0.13초 만에 시작된 은선씨와 스티븐의 화학작용은 지금도 물론 현재진행형이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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