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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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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탱고처럼

[손미나의 레자망]누군가와 함께 걸으려면 우선 혼자 잘 걸어야 한다…
구속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연인, 임진경씨와 윌리엄 무어
등록 2012-05-10 07:39 수정 2020-05-02 19:26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며 사랑의 균형을 맞춰가는 두 사람, 윌리엄 무어(왼쪽)와 임진경씨.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며 사랑의 균형을 맞춰가는 두 사람, 윌리엄 무어(왼쪽)와 임진경씨.

아르헨티나 여행 중 탱고를 배운 적이 있다. 단순한 호기심이 발단이었는데 탱고는 알면 알수록 놀라운 면이 많았다. 상대의 마음을 읽으며 즉흥적으로 움직여야 하기에 교감이 부족하면 곧 다리가 꼬이고 춤은 끝난다. 나의 탱고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와 함께 걸으려면 우선 혼자 잘 걸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이 균형을 유지하며 걸어야 완성된다는 면에서 탱고는 사랑과 많이 닮았다. 탱고를 출 때나 사랑을 할 때나 ‘함께 또 따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모든 걸 던지는 모험 없이 마음껏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문학을 전공한 임진경씨는 일본 도쿄 북서쪽 도야마현에서 국제교류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동갑내기 윌리엄 무어를 만났다. 첫인상이 좋았지만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진경은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기 바빴다. 서먹한 동료로 지낸 지 1년쯤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이 도야마현 대표로 전국 국제교류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단적이고 가벼운 사람일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과 반대로 윌리엄은 한결같이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며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연수 과정 뒤 둘은 가까워졌고 한여름밤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사랑의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그렇게 진경과 윌리엄의 탱고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연인’이 되고 나니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져나왔다. 한국에서 연애할 땐 너와 나의 삶에 앞서 ‘우리’가 존재했다. 매일 안부전화를 하고 공부할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지인의 결혼식에 갈 때나 늘 서로의 곁에 있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호랑이’(1986년생인 윌리엄의 별명이다)와 사귀다 보니 상황은 달라졌다. 절대 침범할 수 없고 침범하려 하지도 않는 각자의 영역이 생겨버렸다. 일이나 운동을 할 때, 친구를 만날 때 둘은 자기 삶에만 집중한다. 그는 밤새워 전화를 붙들거나 꼬박꼬박 집 앞에 데려다주거나 밥값을 대신 계산해주는 일도 없다. 때때로 ‘날 정말 사랑하나?’라는 의구심이 일었다. 진경의 한국 친구들은 “더치페이를 하다니! 남친을 그렇게 길들여서는 안 돼!”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엔 모든 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사랑에 빠지면 손에서 빠져나가곤 하던 무언가를 드디어 품에 안게 된 느낌이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상대에게 소홀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연인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진경은 매일 새벽 인터넷 영어 수업을 듣고, 윌리엄의 집에는 한국어 교재와 한국 역사책들이 꽂혀 있다. 진경은 훈제연어에, 윌리엄은 고추장에 맛을 들였다. 진경은 샤미센에, 윌리엄은 음비라에 빠져 있지만 겨울 내 주말이면 스노보드를 같이 타러 다녔다.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적당한 무게만을 기대며,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알래스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여유로운 가치관을 지닌 윌리엄이 인생과 사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균형이다. 그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여자를 구속하거나 삶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에게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올 9월 진경과 알래스카에 갈 거예요. 거대한 숲과 북극해, 야생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고래와 북극곰과 오로라도 봐야지요. 바다표범 기름 아이스크림도 맛보게 해주고 싶고요!”

탱고는 흔히 ‘하나의 가슴, 네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라 한다. 그런데 탱고와 닮은 사랑에서는 ‘하나의 가슴, 두 개의 다리’가 되어 무언가를 희생하며 살아가거나 ‘두 개의 가슴, 네 개의 다리’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러니 아직 초보일망정 ‘하나의 가슴, 네 개의 다리’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들의 사랑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을 하면 늘 어딘가에 얽매이는 기분이 들었는데 윌리엄을 만난 뒤로는 ‘세상은 넓고 나는 자유롭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윌리엄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막 함께 걷기 시작한 연인,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맞잡은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만일 다리가 꼬이면 상대에게 조금 시간을 주고 다시 걸으면 된다던 탱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려운 순간을 잘 이겨내기를, 그래서 둘만의 멋진 탱고를 완성할 수 있기를.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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