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이들처럼 살 수 있을까? ‘완벽한 메디아 나랑하(media naranja)’(스페인에서는 모든 것이 잘 맞는 최고의 배우자를 ‘메디아 나랑하’, 즉 나의 ‘오렌지 반쪽’이라고 한다)를 만난 커플의 러브 스토리를 듣고 있자니 부러움과 호기심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때때로 주책없이 눈물이 솟았고, 초절정 흥분 상태에 이르러 쓰러져 웃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 ‘천생연분’!
그래픽디자이너 유혜영(41)씨는 스페인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취직했고,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엑토르 로페즈 보필(39)을 만났다. 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지만 연약해 보일 정도의 성품 때문에 마음에 걸렸다. 그때 모든 걸 뒤바꾼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기차를 타려는 순간, 말랑말랑하고 여린 모습만 보여주던 엑토르가 사람 많은 기차역에 예고 없이 나타나 사랑의 시를 낭송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라고 적은 자신의 첫 소설을 손에 쥐어주었다. 혜영씨는 여행 내내 엑토르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온 즉시 그들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1년 남짓한 열애 기간을 거쳐 부부로 산 지 8년째다.
이국땅에서 만난 사랑이지만, 그들의 차이는 이질적 문화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거치는 일들이었다. 엄밀히 따져 한국 여자와 스페인 남자가 아니라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살갑고 정 많은 부모님 슬하에 자란 ‘혜영’이와 카탈루냐에서 태어나 할머니들 손을 오가며 외롭게 자란 ‘엑토르’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결혼 가치관이었다. 결혼을 포기할 수 없는 혜영씨와 사랑만을 원하는 엑토르. 시한폭탄처럼 도사리고 있던 갈등이 결국 폭발해버린 것은 프랑스 파리로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다.
꽃들이 만발한 봄날, 룩셈부르크 공원 분수 앞에 앉아 평화로이 햇살을 즐기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젠가는 당연히 결혼할 생각이겠지’라고 기대한 혜영씨에게 엑토르씨의 반응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릴 적 가정환경 때문에 결혼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단호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혜영, 너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지만 결혼만은 못해.”
한참을 다툰 끝에 엑토르는 다음날 첫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기로 했고, 혜영씨는 파리의 언니 집에 더 머물기로 했다. 그날 저녁 둘은 의기소침해 말없이 비디오를 보았는데,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남자를 위해 만두를 삶아주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본 혜영씨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만두 먹을래?”(혜영)
“만두가 없는데 어떻게 먹어?”(엑토르)
거침없는 추진력을 지닌 혜영씨. 언니네 부엌을 뒤져 두부 반모, 중국산 마른 표고버섯, 호박 하나를 찾아냈다. 맛나는 만두소로 변신시키기엔 어림없는 그 재료들을 다지고 마늘을 듬뿍 갈아넣은 다음, 즉석에서 반죽한 만두피로 그럴듯한 만두를 빚는 데 성공! 엑토르가 10년간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독신주의를 던져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재료로, 그 시간에, 별 대수로운 일 아니라는 듯 척척 만두를 만들어 삶아줄 수 있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뻔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죽어도 결혼만은 안 하겠다던 남자의 마음이 한순간에 바뀐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두부 반모로 시작해 마늘 듬뿍으로 끝나는 그날의 레시피가 아니라, 만두소에 가득 담긴 그녀의 진심과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 뒤 두 달 만에 엑토르는 혜영씨에게 청혼했고, 그들은 한국에서 전통혼례를 했다. 신랑·신부가 주고받은 예물은 결혼식 전날 동네 금은방에서 구입한 실반지 한 쌍, 유일한 혼수는 전기밥솥이었다.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품어줄 줄 아는 여자와 매일 넘치는 사랑을 주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남자. 부부는 가사도 생활비도 공평하게 반씩 분담하고,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상대에게 100% 완벽한 자유를 주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같이 있을 때만큼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시를 써서 바치고, 쓰다듬고 뽀뽀하고 칭찬해주기 바쁘다. 전기밥솥 하나로 시작한 사랑이지만 혜영씨와 엑토르의 사는 모습은 그 누구의 화려한 사랑보다 감동적이다.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바르셀로나 남쪽, 타라고나의 바닷가에 가면 왠지 짭조름한 바다 냄새 대신 달콤한 사랑의 향기가 파도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