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때 변기물만 새지 않았어도…

결혼까지 약속한 사람이 아니라
티격태격 싸우다 헤어진 사람에게 왜 전자메일을 썼을까, 경화씨와 제임스의 인연
등록 2012-07-18 14:23 수정 2020-05-03 04:26
티격태격 만나다 헤어졌지만 가장 슬플 때 생각나는 사람, 경화씨와 제임스의 인연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경화와 제임스 제공

티격태격 만나다 헤어졌지만 가장 슬플 때 생각나는 사람, 경화씨와 제임스의 인연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경화와 제임스 제공

당나라 때 ‘위고’라는 사람이 거리를 산책하다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그 책이 모든 남녀의 혼인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 말하며 눈먼 여인네가 안고 오는 한 여자아이를 가리켜 위고가 결혼하게 될 아이라고 했다. 위고는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으면서도 혹시 사실이면 아이가 클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싶어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하인에게 여자아이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 뒤 14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위고는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첫눈에 신붓감이 마음에 쏙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한 가지, 바로 미간에 칼자국이 있었다. 위고는 장인에게 어쩌다 그런 흉이 생겼는지 물었다. 그러자 장인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답했다. “저 애가 세 살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14년쯤 전이지 아마. 보모가 저 애를 안고 가는데 어떤 미친놈이 다가와 찌르고 도망을 갔지 뭐야. 아주 큰일 날 뻔했지.”

이상은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고사다. 인연이란 이런 것이다. 특히 부부의 인연은 그렇다고 한다.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그럴 수 없고 하늘이 맺어준 대로 결국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늘이 정해주는 연이라고 해서 거창하게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사건은 아주 작은, 때로는 사소하고 의미 없는, 전혀 뜻밖의 일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독일계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최경화씨는 대학 시절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미국 남성 제임스 브룬을 알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경화씨는 그가 당시에 다니던 영어학원의 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만남이 시작되었지만 두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할 정도로 성격과 성향이 달랐다. 사랑하지만 잦은 헤어짐과 만남의 반복 속에 지치게 된 그들은 결국 이별을 택했다. 그리고 경화씨는 싱가포르 지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계획했다가 다시 싱글이 된 어느 날, 장기 출장을 갔다 돌아왔더니 너무나 당황스런 상황이 경화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싱가포르 시내의 한 콘도에 살고 있었는데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새 온 집 안이 물에 잠겨 있었던 거다. 더운 날씨에 더러운 물이 넘쳐 2주간 있었으니 창문은 모조리 사우나처럼 김이 서렸고 가구와 옷에는 곰팡이가 피었다. 일주일도 넘는 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을 불러다 집을 복구하고 세간살이와 옷을 다시 장만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고, 타국에서 여자 혼자 그런 일을 겪으니 그 어려움은 몇 배에 달했다.

때아닌 물난리를 겪고 상황을 복구하는 동안은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막상 모든 일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오랜만에 맞은 평화로운 일요일, 단골 카페에 앉아 남국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의 나라에 와서 혼자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은 슬픔이 몰려왔다. 그때, 이상하게도 블랙베리에 저장돼 있던 수많은 전화번호와 전자우편 주소 중에서 제임스의 것으로 손이 갔다. 얼마 전 헤어진, 결혼까지 약속했던 그 사람이 아닌, 벌써 한참 전에 헤어져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제임스에게 그녀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전자우편을 쓰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건만… 며칠 뒤, 제임스는 싱가포르로 날아왔고 반지를 내밀며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고, 줄곧 이런 날이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평생 동안 곁에 있고 싶다 말하면서.

지금도 그들은 종종 다툰다. 물론 사소한 일에서 빚어지는 사랑싸움이기에 곧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손을 잡지만 꼭 한 번씩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변기물만 새지 않았어도….’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변기물이 새지 않았더라면 또 다른 예상 밖의 사건이 그들을 연결해주었을지.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