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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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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게 만드는 개망신 복수혈전

얼큰한 홍합 국물맛의 서울 이수역 홍가
등록 2012-03-17 11:33 수정 2020-05-03 04:26

연 이틀째 술 처먹고 새벽녘에 기어 들어와 맞은 수요일 아침, 와잎이 물었다. “오늘은 일찍 오지?” 전날 새벽에 먹은 안주로 개그맨 김준현으로 빙의한 난, 중얼중얼 말을 흐렸다. “오늘도 약속이… 있는~데….” 와잎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알았어. 그 대신 넘 늦지 마.”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자기와 함께하는 술자리는 주칠일도 되지만 자기 없는 술자리는 주이일도 불가한 와잎 아닌가. 너 뭐 잘못 먹었니? 어제 먹은 큐팩이 아직 안 깼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반문은 긁어 부스럼일 뿐. 나는 그저 속으로 고뤠? 그지? 오늘도 달려도 되겠지? 못 먹게 하면 집으로 사람 부르려고 했는데~라고 까불 수밖에. 앗싸~.

가벼운 발걸음에 콧노래를 부르며 약속 장소인 서울 이수역으로 향하는 퇴근길.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전무후무한 뿌듯함까지 밀려오는 찰나. 와잎이 전화했다. 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전활 받았다. “왜? 자기야?” 와잎은 차갑게 말했다. “벌써부터 술 먹었냐?” 으이구~ 진짜 술 먹고 싶게 만드는구만~. 어디서 만나냐고 묻는 와잎의 말에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으나 난 사실대로 말했다. 와잎은 진짜 일찍 오라는 말만 남겼다.

한때는 ML주의자를 자처하다 결혼 뒤 M(anu)L(a)주의자가 돼 아내의 호출에 칼같이 귀가하는 대학 동아리 선배와, 한때는 재벌 직장인에서 이제는 로스쿨 낭인이 된 후배를 홍합요리 전문점인 홍가에서 만났다. 홍합탕과 오돌뼈, 주먹밥 세트메뉴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구 돌렸다. 주먹밥과 오돌뼈로 허기를 달래며 얼큰한 홍합 국물을 마시는데 “낡은 정치에 종을 치겠다”는 지역의 진보정치인이 전활 했다. 함께 보려다 약속이 어긋났던 차에, 같이 마시고 있는 회사 선배와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3명보단 5명이 낫지. 합석한 우리는 연방 짠으로 달아올랐다. 같이 왔던 회사 선배가 먼저 가고, 아내의 호출이 아직 안 왔던 ML주의자는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해 진보정치인과 종을 칠 기세로 토론을 했다. 그 진지하고 있어 보이는 자리에서도 나와 후배는 재미없다람쥐~ 집에가불까불이~를 외치며 꺾기도 신공을 연마했다. 바로 그때였던 것이었다람쥐. 와잎과 아들 녀석, 아들 녀석의 친구 SJ와 SJ 엄마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들 녀석은 술집에서 큰 소리로 아빠~를 외치며 내게 달려왔다. 술 먹느라 정신 팔린 남편 애 데리고 잡으러 왔구나~. 아주 눈물겨운 부자 상봉이구나~.

와잎은 웃으며 내 일행과 인사했다. 정치인이니? 내 와잎의 주사를 경험한 적 있는 일행은 가식적인 박수로 와잎을 맞았다. 진짜 정치인이구나~. 와잎은 옆자리에서 간단히 먹고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너 같으면 걱정 안 하겠니? 좀 떨어져 앉은 와잎은 SJ 엄마와 본격적으로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과 SJ는 두 자리를 뛰어다니며 서로 “우리 아빠 고추가 더 크다~”를 외쳤다. 손님들이 히죽 웃었다. 아들아~ 그건 하지 말라고 했잖아이쿠야~. 화장실을 다녀오던 진보정치인이 손님들에게 명함을 돌리자 아들 녀석과 SJ는 그 자리에도 따라가 “우리 아빠 고추 되게 크다”를 연신 외쳤다. 난 달려가 아들 녀석의 입을 막고 자리로 돌아왔다. 뒤에서 여손님들이 말했다. “막, 상상하게 돼~. 호호.” 와잎이 먼 발치에서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와잎의 개망신 복수혈전은 시작에 불과했다. 문의 070-8772-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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