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는 명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만 남긴 게 아니었다. 극 중에서 종이에 손을 벤 여자에게 머리 위로 손을 들고 흔들면 피가 멈춘다고 가르쳐준 남자. 그 낭만적인 응급처치법을 보고 배워 지금까지도 써먹는 이들이 왕왕 있다.
백수 시절, 서울 신촌에서 대낮에 그 영화를 보고 난 다음해부터 편집자 일을 시작했다. 사랑은 스크린 속에만 있었듯, 책 만드는 일에 대한 로망은 출판사 문 밖에만 있었다. 창고에 쌓인 책을 나르는 데는 두뇌회전보다 팔뚝 힘이 필요했고, 저자의 호통에 대응하기에는 영민함보다 맹함이 나았다. 우아하게 펜을 잡을 것 같던 손은 기획안이 담긴 복사지, 원고를 흘린 교정지, 인쇄소에서 막 나온 가제본, 홍보 관련 출력물 등 온갖 종이에 수난을 당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어느 인쇄하시는 분은 손에 종이에 베인 자국이 늘어가는 것이 계급장 같다 했다. 한 번씩 교정지에 피를 묻힐 때마다, ‘그래, 니가 피 맛을 봐야 물건이 되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매번 몸의 수분이 마르고 피가 줄어드는 가운데 모든 에디터들은 책을 만든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출판사는 종이로 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것들은 실제로 수분을 잡아먹는다. 피부는 버석거리고, 손은 거칠어진다. 겨울이 되면 가습기를 미친 듯 틀어야 하고, 출판사 내부의 식물에게는 물을 자주 줘야 한다.
이제 책을 보면 본문 용지는 몇 g인지, 표지 용지는 뭘 썼는지 먼저 보는 걸 보니, 나는 확실히 이 바닥 ‘업자’가 된 듯하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빨간 펜, 포스트잇, 수정액, 그리고 반창고와 핸드크림이 있다. 무난한 반창고에 식상해지면 아들내미를 빙자해 ‘뽀로로’ 반창고를 붙이기도 한다. 국제도서전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있으면 서점에도 들르지만, 생활용품점에 가서 핸드크림과 반창고를 꼭 산다. 그리고 돌아와 ‘물 건너’의 것들을 품평하며 명품 가방을 가진 것처럼 흐뭇해한다.
앞으로 전자책을 만들게 되면 손가락 관절약을 상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모니터로 봐도 될 것을 굳이 출력해서 종이를 넘겨가며 봐야 어떤 책이 될지 감이 오는 걸 보면, 책은 그 본질이 아날로그다.
지난주엔 엄지는 경제경영서, 검지는 소설, 중지는 에세이 교정지에 하루 걸러가며 베였다. 반창고를 찾아 붙이고, 피가 배여 나오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이게 에디터의 변태스러움이다. 반창고를 붙인 손을 보면, 비싼 반지를 낀 것처럼 예뻐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에디터의 머스트 해브 패션 아이템이다.
당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얇은 종이가 내는 상처는 예상보다 꽤 쓰리고 오래간다. 한 권의 책이, 읽는 이의 영혼을 찌르는 힘이 그리 아프기를, 오래가기를 언제나 바란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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