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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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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윈도 초콜릿의 세계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생태계를 돌아보다… 합성감미료의 불량스런 단맛에 맞서 신선한 재료를 쓴 수제 초콜릿들의 반격
등록 2012-02-14 15:21 수정 2020-05-03 04:26

고백하건대 기자는 단것을 싫어한다. 해마다 돌아오는 무슨무슨 ‘데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여서, 연애할 때부터 그런 날에는 초콜릿 대신 삼겹살이나 곱창을 구우며 서로의 빈 잔에 소주를 부어주곤 했다. 그런데 초콜릿을 취재하고, 또 기사를 써야 한다니! 황망한 일이다. 동네 편의점과 제과점을 돌며 초콜릿이라면 일단 사들였다. 어린 시절, 고(故) 장궈룽(장국영)의 광고로 유명세를 탔던 초콜릿이 여전히 진열장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초콜릿이 아니라 ‘쪼꼬렛’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희미한 기억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을까. 포장을 찢어냈다. 무작정 먹었다. 달았다. 다른 초콜릿들도 시도해봤다. 다디달았다. 달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캐러멜이 들어간 초콜릿은 쫀득쫀득하게 달았고, 크런치한 알갱이가 들어 있는 초콜릿은 바삭바삭하게 달았다. 끼니때가 지났지만 배가 고플 리 없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자리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먹지?

음식으로서의 수제 초콜릿

서울 홍익대 인근의 수제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봄’ 매장. 카카오봄 제공

서울 홍익대 인근의 수제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봄’ 매장. 카카오봄 제공

밸런타인데이 시즌이 돌아왔다. 로마의 사제 발렌티노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한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에 반기를 들어 서기 270년 2월14일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밸런타인데이는 원래 가족, 친지가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교환하는 날이었다거나, 비슷한 시기에 순교한 동명의 성직자가 두 명 더 있기 때문에 정확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다거나, 현대의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을 판매하는 거대 기업들의 상술일 뿐이라는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해마다 초콜릿·사탕, 심지어 빼빼로까지 주고받아야 하는 관습을 불편해하든, 그렇지 않든 밸런타인 문화는 하나의 현실이 됐다. 최근에는 초콜릿만 취급하는 전문점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른바 ‘윈도(Window) 초콜

쇼콜라티에(Chocolatier·초콜릿을 만드는 장인)들은 초콜릿을 ‘과자’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카카오봄 제공

쇼콜라티에(Chocolatier·초콜릿을 만드는 장인)들은 초콜릿을 ‘과자’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카카오봄 제공

릿’ 매장들이다. 제과업체의 공장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음식으로서의 초콜릿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제 초콜릿을 취급하는 전문 매장에서도 밸런타인데이(2월14일)부터 화이트데이(3월14일)까지의 한 달은 대목 중의 대목이다. 서울 신사동에서 프랑스식 수제 초콜릿 전문점 ‘삐아프’를 운영하는 고은수 쇼콜라티에(Chocolatier·초콜릿을 만드는 장인)는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한 해 매출의 3분의 1 이상이 이 기간에 팔려나간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초콜릿 중심의 디저트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려면 몇 년 더 걸리겠지만, 입소문을 타고 알아서 찾아오는 고객이 계속 늘어나는 것

초콜릿 전문점에서는 각종 음료 형태의 초콜릿도 맛볼 수 있다. 카카오봄 제공

초콜릿 전문점에서는 각종 음료 형태의 초콜릿도 맛볼 수 있다. 카카오봄 제공

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료의 신선함’을 최고로 여긴다는 그는 “초콜릿을 만들고 먹는 일은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이라고 했다. 매장의 실내 온도는 초콜릿을 즐기기에 가장 적당한 18~20℃로 유지하고 있다. 초콜릿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커피는 제공하지 않는다. 프랑스 게랑드 천일염 한 알, 전북 고창의 유기농 유자가 들어간 초콜릿 등이 인기 메뉴라고 한다.

전날 흡입한 온갖 ‘단것들’의 불쾌함이 아직까지 위장에 남아 있었다. 수제 초콜릿이라면 과연 다를까.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7년째 영업하고 있는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봄’을 찾았다. 쭈뼛쭈뼛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초콜릿을 원료로 한 각종 음료와 함께, 이름도 생소한 40여 가지의 초콜릿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벨기에식 초콜릿 ‘프랄린’(Praline)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가게다. 프랄린은 여러 재료의 반죽 표면을 다시 초콜릿으로 코팅(Pralineren·뒤집어씌우다)한, 한입 크기의 기호식품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봉봉 오 쇼콜라’(Bonbons au chocolat)라고 부른다. 프랄린에 대한 벨기에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한때 독일인들의 프랄린 구매 열풍이 지나쳐 독일과 벨기에를 잇는 철도를 ‘프랄린 익스프레스’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가을 내음 같은 맛, 이게 뭐죠?

매장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초콜릿들. 카카오봄 제공

매장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초콜릿들. 카카오봄 제공

마트나 제과점에서 판매하는 일반 초콜릿과 수제 초콜릿의 차이를 고영주 쇼콜라티에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햇반과 엄마가 경기도 이천쌀을 갖고 돌솥에 지어주는 밥의 차이와 같다”고 설명한다. 초콜릿은 카카오 씨앗을 가공해 만드는 카카오매스와 카카오버터를 원료로 한다. 시중에 판매되는 일반 초콜릿 제품의 카카오 함량은 20%를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부분 설탕과 인공적으로 맛을 가미한 합성감미료, 유화제 등의 성분으로 채워진다. 그나마 카카오 함량을 제대로 표기한 제품도 찾기 어렵다. 카카오버터 대신 식물성 대용 유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극소량의 원료에 이러저러한 단것들을 버무린 물질을 우리는 초콜릿이라고 불러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삐아프’의 고은수 쇼콜라티에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삐아프 제공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삐아프’의 고은수 쇼콜라티에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삐아프 제공

온 셈이다.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거나 건강을 해친다는 이야기도 그 때문에 나왔다. “이런 저질 초콜릿 때문에 우리에게는 ‘단맛’의 문화 자체가 없어요. 할머니와 함께 조청에 찍어먹던 떡의 단맛, 어린 시절 즐기던 엿의 단맛도 우리는 현대적으로 되살리지 못했죠. 단맛을 느끼고 음미할 삶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제대로 된 단맛을 느껴보지 못한 많은 분들이 그래서 단것을 싫어합니다.” 초콜릿을 만들고 먹는 일을 “일상에 쉼표를 찍는 행위”라고 비유하는 그는 “초콜릿 한 조각을 입안에 넣는 행복감, 단맛을 나누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삶의 여유에 대한 갈증 때문에 수제 초콜릿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반죽 형태의 내용물에 초콜릿을 입히고, 또다시 다른 재료를 묻히면 트뤼플(Truffle)이 된다. 이처럼 수제 초콜릿은 그 재료와 제작 방식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하다. 카카오봄 제공

반죽 형태의 내용물에 초콜릿을 입히고, 또다시 다른 재료를 묻히면 트뤼플(Truffle)이 된다. 이처럼 수제 초콜릿은 그 재료와 제작 방식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하다. 카카오봄 제공

‘진짜’ 수제 초콜릿은 원료인 고형 초콜릿을 자르고(커팅), 녹이고(멜팅), 식히는(템퍼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어 내용물에 초콜릿을 입히는 디핑, 틀에 부어 모양을 잡는 몰딩 등을 통해 제품이 완성된다. 디핑 초콜릿에 또다시 다른 재료들을 묻히면 트뤼플(Truffle)이라고 부른다. 각종 향신료와 부재료를 이용한 변주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19세기 독일의 과학자 훔볼트는 “초콜릿은 자기만의 언어, 호흡, 맥박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제품인 만큼 유통기한은 종류에 따라 일주일에서 최대 석 달을 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초콜릿 전문점 중에서도 수제 초콜릿이 아닌, 완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매장의 초콜릿은 6개월 이상의 유통기한을 허용하기도 한다.

‘사람’이 만드는 ‘음식’으로서의 초콜릿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그가 추천한 초콜릿 음료를 맛봤다. 카카오 열매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치는 크리올로빈이 원재료라고 했다. 분명 달았다. 그러면서도 달랐다. 우선 부드러운 풍미가 앞섰다. 단맛은 따뜻한 초콜릿 액체가 입안에 머물다 식도로 넘어가는 사이, 그 어디에선가 잠시 느껴졌다. 결들여낸 나뭇잎 모양의 몰딩 초콜릿을 베어물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가을 내음이 스쳐가는 것 같았다. “이게 뭐죠?” 직원에게 물었다. 비교적 부드러운 다크초콜릿을 베이스로, 시나몬이 첨가됐다고 했다. 이런 맛도 있었구나. 단것이라면 무작정 배척하던 무지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터무니없는 고급화는 개운치 않아

가격은 어떨까? 수제 초콜릿이기에 터무니없는 고가일 것이라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국내 수제 초콜릿 전문점들은 대체로 한 점에 2천원 전후의 가격을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물용 세트도 2만원대의 구성에서 시작한다.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다면, 그리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다. 한편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초콜릿은 프랑스 왕실에 납품했다는 ㄷ사의 초콜릿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매장을 두고 있는 이곳의 초콜릿은 수제가 아닌 프랑스 현지 공장에서 수입된 완제품이지만, 한 점에 7천~8천원이 넘는다. 한 점에 2만원짜리 초콜릿도 있다. 선물세트 중 최고가 제품은 36만원에 달한다. 현지 가격의 서너 배가 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초콜릿은 특정 계층이 거들먹거리면서 맛보는 제품이 아니다. 이는 고급화가 아니라, 오히려 초콜릿 문화에 대한 접근을 저해할 수 있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하기야 밸런타인데이에 36만원짜리 초콜릿을 선물받는다면, 다음 화이트데이 때 본전 맞춰줄 생각에 뒷맛이 개운치는 않겠다. 아까워서 먹어치울 수도 없고.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참고 문헌 (고영주 지음·비앤씨월드 펴냄)


공정무역 초콜릿의 불편한 진실
인증 확인하고, 유기농 고르시라
<한겨레21> 조혜정

<한겨레21> 조혜정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착한 소비’ 열풍을 탄 공정무역 초콜릿(745호 표지이야기 ‘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 참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공정무역연합은 ‘카카오봄’ 고영주 대표와 공동으로 2월4일과 11일 이틀 동안 공정무역을 통해 유통된 재료로 선물용 초콜릿을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행사를 마련했다. ‘아름다운가게’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그리고 서울도시철도공사는 2월9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공정무역 초콜릿을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를 열었다. 해마다 공정무역 초콜릿을 판매하는 생활협동조합 ‘아이쿱’은 과 정기구독을 신청하는 2012명에게 2만원 상당의 공정무역 다크초콜릿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홈쇼핑과 GS숍이 공정무역 초콜릿 판매에 나서는 등 대기업도 팔을 걷었다. 국내 대형 커피브랜드인 할리스커피도 공정무역 초콜릿을 출시했다. 하지만 국내 유통업계는 글로벌 자본이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에 ‘카카오 노예노동’이라는 구조를 구축하는 데 조력한 공범이기도 하다. 공정무역 인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태가 아니냐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규모도 문제다. 롯데홈쇼핑이 지난해 방송에서 판매한 공정무역 초콜릿은 2만9천원짜리 350세트였다. 올해는 비슷한 가격의 제품 1천 세트를 준비했다고 한다. 전체 물량이라고 해봐야 3천만원이 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스타벅스도 “공정무역 커피를 공급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규모는 자사의 전체 커피 유통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공정무역연합 박창순 대표는 “공정무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대기업들이 이미지 제고를 위해 공정무역 초콜릿을 하나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그 규모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심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기왕의 선행이 선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라도 세계공정무역인증협회(FLO) 등 공신력 있는 단체의 인증 여부를 확인하고, 합성유화제 등 인공 첨가물을 배제한 유기농 초콜릿을 고르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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