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연말 모임이려니 했다. 와잎 친구의 집들이 겸 부부동반 모임이니 서로 데면데면하게 새해 덕담이나 주고받는 자리겠지 싶었다. 나보다 2살 위인 그는 인상마저 순했더랬다. 그동안 말씀 많이 들었다며 수줍게 등심을 불판에 올리는 그를 보면서, 음~ 간만에 우아한 술자리가 되겠구만~ 난 안도했다. 소주잔을 돌리는 손이 마치 타짜가 패를 돌리듯이 기민하고 분주해도, 한 손으로 고기를 굽고 한 손으로 소주를 따르는 멀티 플레이어 액션에도 난 의심하지 않았다. 때는 2011년의 마지막 날, 우리는 처음 본 사이가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면 안 돼~ 스스로를 다잡는 순간, 와잎이 또 시동을 걸었다. “해피 뉴 이어~, 한잔해요!” 그렇게 마시면 해피 뉴 이어 되겠니? 꽐라돼서 ‘해피 뉘여~’ 하는 거 아니니? 난 눈빛으로 ‘컴다운~ 택잇이지’를 간청했다. 와잎은 이미 매직아이된 눈으로 그와 ‘짠!’을 하고 있었다. 외간 남자랑 술 마시니 좋으니? 12월31일까지 시종일관 달리는구만~. 오는 동안 그렇게 단속했으니 오늘은 조신하게 마시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난 등심을 흡입했다.
몇 순배 술이 돌고, 그와 난 집 밖으로 나와 담배를 주고받았다. 왜소한 체격의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차력 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누가 물어봤니?). 합기도와 태권도를 7년 동안 배웠다고 했다(말씀 놓으세요~). 순해 보였던 그의 눈빛에 살기가 번뜩였다(제가 동생인데요~). 내 짝다리는 어느새 열중쉬어가 되었다(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시 집에 들어오니 그의 쌍둥이 아들과 내 아들 녀석이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난 순간이동으로 아들의 장난감을 뺏어 쌍둥이에게 건넸다. 아들 녀석은 울었다. 와잎은 왜 애를 울리냐고 난리였다. 아들의 입에 츄파춥스를 물리며 와잎에게 나직이 말했다. “닥치고~ 유단자야~.” 와잎은 ‘뭔 소리여 시방~’이라는 표정으로 옆자리 친구와 연신 ‘짠!’을 하고 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여자야~. 이건 옳지 않아~.
차력남과 와잎의 눈치를 보며 템포를 맞추고 있는데, 차력남이 소주가 떨어졌다며 조니워커를 꺼내왔다. 난 안 돼~를 속으로 외쳤다. 차력남은 ‘차디찬 글라스’에 조니워커를 맥주처럼 부었다. 차력남의 부인이 말려주길 바라며 둘러보니 쌍둥이와 내 자식을 돌보느라 남편의 만행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도 좀 돌봐주세요~. 이 와중에 아들 녀석들은 서로 자기 “아빠의 고추가 더 크다”며 민망한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와잎과 쌍둥이 엄마는 상상하게 된다며 박장대소했다. 난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력남은 아이들 얼굴에 연방 뽀뽀를 해대며 호기롭게 웃었다. 넌 진짜 크니?
이윽고 양주도 다 떨어지자, 차력남은 집 근처 참칫집에서 소주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했다. “너무 늦었는데”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아싸~를 외치는 와잎의 함성에 그냥 묻혀버렸다. 야~ 우리의 다짐 어디 갔어? 술 작작 먹겠다는 약속 어디 갔어? 아들 녀석을 쌍둥이 엄마에게 맡기고 도착한 곳은 인근의 ‘기꾸참치’. 차력남은 자신이 쏘겠다며 진세트 2인분을 시켰다. 참치맛은 다른 집과 엇비슷했는데, 같이 나온 묵은지에 싸먹는 맛이 별미라고 느끼며 고개를 드니, 차력남이 소폭을 말고, 와잎이 기도를 연 채 들이붓고 있었다. 짜이~ 짜이~ 니들 무슨 차력하니? 차력남, 누구냐 넌? 갑자기 손님들이 술렁였다. 자정이었다. 옆자리에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오갔다. 에헤라 디야~ 아주 정초부터 임진외(外)란이구나~. 2012년 1월1일 01시 꽐라신이 된 차력남 덕분에 계산은 내가 했다. 일부러 취한 거니? 차력은 니들이 하고 돈은 내가 내니? 잠든 아들 녀석을 안고 비틀대는 와잎에게 어깨를 내준 귀갓길 택시 안. 처복 없는 난 차력남을 제외한 세상 모든 유부남들을 위해 기도했다. “새해 처복 많이 받으세요~.” xreporte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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