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큰아이의 첫 유치원 수업 날, 선생님이 물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딸은 주저 없이 답했다. “가방, 친구.”
한참 전 미국 뉴욕 출장길에 구입한 이름 없는 갈색 가방. 가방끈은 짧다. 자체로 제법 묵직하다. 가방에 늘 담고 다니는 것들이 있다. 몰스킨 노트 한 권, 휴대전화 충전 장치, 가죽 필통. 필통 속엔 형광펜 하나, 샤프펜슬 하나,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스테들러 연필 세 자루.
초등학교 때 새 학기 선물로 가방을 받았다. 다들 보자기를 책가방 삼던 시절, 3·1절을 보내고 나면 새 학년이 시작됐다. 학교 가기 전날 밤 가방을 챙겼다. 이제는 이름도 낯선 국어, 산수, 사회, 자연, 도덕…. 아버지는 국정교과서에 달력 뒷면을 재활용한 책표지를 입혀주셨다. 새로 산 공책마다 이름을 새기고 연필을 또박또박 깎아 필통에 넣고 나면, 그것으로 개학 준비는 끝. 새 연필, 새 지우개, 새 공책, 새 필통, 새 교과서, 새 가방, 그렇게 한해살이는 시작되곤 했다. 비닐 냄새 나는 새 가방을 머리맡에 세워두고 잠자리에 빠져들던 어린 시절의 뿌듯함.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말대로, 우리는 ‘문자공화국’을 살아간다. 문자공화국 시민으로서 ‘시민권의 두 가지 자질인 읽기와 쓰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읽기와 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종이와 연필과 책이라면, 이들을 한군데 담아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가방 아니겠는가. 비닐이건 가죽이건, 가방은 공화국 시민의 필수 목록쯤 되는 셈이다.
그런데 사람도 변하고, 가방도 변한다. 여성의 필수품이던 핸드백이 어느새 남성 손에 쥐어지기도 하고, 때론 가방의 위기가 거론되기도 한다. 종이문명의 위기가 연필의 위기고, 공책의 위기고, 종이책의 위기다. 스마트 시대 덕분이다. 손안의 혁명이 된 스마트폰과 태블릿, 클라우드 시스템은 간소하되, 우리의 지식과 기억조차 아웃소싱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가방 속에 쑤셔넣어야만 안심이 되고 가방을 열어야만 일을 할 수 있던 세대에겐 견디기 힘든 불안함이다. 가방의 슬픔이 세대의 슬픔이다. 하지만 가방은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유권 사회(Ownership Society)의 인간형이다. 명품 가방은 아니더라도 멋스러운 가방이 주는 행복은 분명 존재한다. 가방은 소유를 넘어 또 하나의 자기표현 수단이다. 개성이고 품격이다.
늦은 밤 학교와 학원 숙제를 끝내고 난 초등학생 딸아이 둘은 가방을 챙겨 현관 입구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침대로 향한다. 하나는 학교 가방, 하나는 학원 가방. 필통도 둘이고, 물통도 둘이다. 때로는 바이올린 가방까지. 이제 가방은 아빠의 것이 아니라, 딸들의 것이다.
변호사·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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