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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접속하는 코드

빗자루는 이야기를 싣고
등록 2011-10-27 18:07 수정 2020-05-03 04:26
사진 현시원 제공.

사진 현시원 제공.

더 명랑해진 ‘너의 의미 2’를 위해 소도시에 거주하는 ‘빗자루 장인’을 만나러 갈 채비를 하던 나는 빗자루에 평생 몰입해온 장인 대신, 거리 곳곳에 있는 빗자루를 수없이 목격하는 헛된 수집에 한동안 몰두했다. 거리와 건물 사이사이에서 빗자루를 찾아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는 사이 녹색 플라스틱 빗자루는 땅의 먼지와 거리를 두려고 거꾸로 세워 보관된다는 사실, 그리고 1960년대 초 청소노동자 12명이 모여 빗자루를 들고 시위한 것을 비롯해 이후 국내의 수많은 시위에 빗자루가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빗자루로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은 의외로 다양하다. 중세시대 마녀가 이상한 국물을 만들어 빗자루에 붓기라도 한 걸까. 빗자루는 사라져가는 공중전화 박스보다 더 생명력이 길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최근 미국의 뉴욕 월가를 점령한 시위대가 빗자루로 행진 시위를 펼친 것을 비롯해, 서울시장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첫날에는 한 여성이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에 나타났다. 신문에 담긴 사진의 설명 글은 ‘빗자루를 든 엘리트 여성’. 그 주인공은 당신이 예측하듯,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였다. 연두색과 보라색이 섞인 빳빳한 질감의 빗자루는 꽤나 예뻤고 우아했다. 보통 만화책에서 마구 달려가는 사람의 발 모양처럼 휙휙 빠르게 움직이는 보통의 빗자루에 비해, 사진에 잡힌 빗자루의 동작은 슬로 버전으로 매우 조신했고 정지 상태에 가까웠다.

이 빗자루는 최첨단 피부 클리닉 기계에 도움 받았던 여인이 모처럼 과거의 시간대, 그리고 전통적 가치관과 접속할 수 있게 돕는다. 로봇이 아닌 목장갑 낀 손으로 청소하는 모습은 사실 이것이야말로 ‘청소의 날’ 지정을 취미로 알았던 19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칭찬해 마지않던 솔선수범이자 노스탤지어가 된 풍경이다. 이제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청소하는 건 내 집 앞마당이 아닌 이상 청소노동자뿐이지만, 예전엔 집단적 청소가 나라의 부흥과 맞닿아 있었다. ‘시민 청소의 날’(1970년대), ‘새마을 청소의 날’(1980년대 초), ‘전국 청소의 날’(1990년대)과 같이 각 시대마다 이름도 다양하게 붙여졌다. 이런 청소의 날에는 청소 독려와 시범청소가 반드시 실행됐다. 고개 숙여 다 함께 청소하는 기념 장면들이 ‘대한 늬우스’에도 방영됐다.

2011년 한 정치인의 빗자루 청소는 복고풍 퍼포먼스다. 청소도구 빗자루는 엘리트 여성이 들고 있으면 화제가 되는 비현실적인 과거의 물건이 된다. 물론 청소도구도 청소도구 나름이다. 1948년 싱어사가 내놓은 진공청소기는 ‘갖고 싶은 사물’이었다. 중산층 여성이 실내 청소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하는 데 필요한 진입 도구로 1950년대 ‘가장 우수한 디자인’ 중 하나로도 뽑혔다. 당시 집으로 배달된 미국의 광고 전단지에는 진공청소기를 사용하는 주부 사진 옆에 빗자루를 들고 낑낑 힘들게 청소하는 여인의 모습이 대비돼 있다. “청소기가 있으면 마음껏 바깥 산책을 하고 집에 늦게 와도 좋습니다”라는 광고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 빗자루를 든 여성은 점점 제 건강과 안위를 챙길 여유가 없는 계층으로 표상됐다.

독립 큐레이터 sonvadak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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