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친구가 너무 많은가. 아니면 너무 적은가. 이 모든 건 어쩌면 에서 예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만으로는 모자라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친구에게 이름을 붙이는, 아니 붙이며 몸소 친구를 만드는 방법 말이다. 안네가 편지 형식으로 쓴 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친구의 이름(일기장 이름은 키티)과 함께 희뿌연 상상을 실체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꿈속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을 대상에게 이름을 붙이며 친구 삼는 것. 이 엉뚱한 짓에 누구도 “당신의 친구는 여기 없어”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에 이름을 붙이며 새로운 친구를 자꾸만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경북 경주에서 만난 남녀 꼬마 두 명은 ‘관이’와 ‘금이’였다. 비 오는 날, 신라시대 금관을 머리에 쓰고 문 앞을 지키는 이 둘을 나는 보았다. 자색과 비색의 옷을 사이좋게 나눠 입은 이들은 왕과 왕비를 상징화한 경주시 캐릭터였다. 둘의 모습을 본 친구는 “어떤 백성도 이들을 왕과 왕비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찬란한 시대를 이끈 왕과 왕비의 위엄 대신 이들은 꼬마처럼 보였다.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와 우리 집 부드러운 화장지 ‘뽀삐’가 그렇듯 커다란 눈망울은 귀여움 받고 싶은 ‘펫’(Pet)의 모습이다. 서울로 돌아와 이 거대한 눈동자의 이유를 경주시 홈페이지에서 읽었다. “캐릭터의 빛나는 눈빛에서는 신라인의 총명함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문지기 왕족 ‘금이’의 눈이 아플 것 같다.
사람들은 이름을 붙이고 얼굴을 만들고 ‘할 일’을 부여한다. 그리고 친구라고 부른다. 캐릭터, 마스코트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로봇 또한 그렇다. 인간의 형태를 닮은 ‘휴머노이드’들은 인간의 몸동작을 따라하고 인간만 한 크기에, 웃음 표정과 눈매까지 따르며 변화해왔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증명에 매달리는 로봇마저도 인간이 시키는 일을 기본으로 움직인다. 간호하고 청소하는 식의 ‘일’이 중요한 것은 로봇의 어원에서도 알 수 있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희곡 (1920)에서 시작된 이 말에는 체코어로 ‘일하다·노동’ 이라는 뜻의 단어 ‘로보타’(Robota)가 숨어 있다.
캐릭터와 로봇에게까지 외모지상주의를 투사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금이와 관이가 언제까지 친구일지 궁금한 나는 이 가을, ‘왕범이’라는 이름을 불러본다. 서울시 캐릭터였던 왕범이는 언제나 일하는 로봇이었다. 웹에 남아 있는 왕범이의 소개는 신경증에 걸려 고층 아파트에서 괴성을 지르고도 남을 월요일의 직장인 같다. “저는 지난 1994. 10. 28 6:00(서울 정도 600주년)에 태어났어요. 저는 벌써 키가 172.7cm(서울시민 평균키)에 꼬리는 88cm(88 서울올림픽 상징)이고요, 귀는 20.02cm(2002 월드컵 상징- 귀가 2개이어서 한-일 공동체를 의미)이랍니다. 발 사이즈는 25cm(25개의 구가 서울시를 떠받치는 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나 된다고요.”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지냈던 왕범이는 해치에게 제 역할을 물려준 걸 아마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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