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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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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쓴 너의 이야기들

등록 2012-02-25 14:55 수정 2020-05-03 04:26

한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습성이 있는 나는 한때 산울림의 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므로 ‘너의 의미’라는 칼럼 이름은 누구 한 명이 만든 단어가 아니라 이 노래가 마구 울려퍼지던 서울 평창동을 지나는 버스 1020번에서 시작된 것이다. 운전기사님이 하필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춰주었고, 나는 버스에 타고 있었고, 게다가 누군가 좋아해볼까 생각하던, 마음이 꽤나 넓었던 순간이었다. 노래가 그때의 세상을 꽉 채웠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라는 노랫말이 독특한 음조와 합쳐질까 싶으면 다시 노래는 단조롭게 끝났다.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라며 사람을 아리송 50%, 기분 좋게 30%, 울적 20% 하게 만든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척하는 노랫말. 너무 좋아하지만 ‘수수께끼’라는 단어만 알싸하게 남기고 떠나가는 그런 노래다(유튜브로 한번 들어보시길).

수수께끼로 남은 몇 가지 ‘사물+디자인’을 여기에 남겨놓고 다른 곳으로 가보려고 한다. 우선, 칼럼에 몇 번 써보려다 실패했던 것은 ‘쇼핑카트’다. 마트에 가면 정신이 산란해서 금방 짜증 모드가 되는 나는 쇼핑카트에 올라타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이 몇 번 있다. 정말 덩치 큰 꼬마 쌍둥이들도 타던데 100kg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움직이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 그리고 물건을 소비하면서 카트 안에 쌓아올리는 행위는 무엇인가 장난감을 쌓아올리는 듯한 창조적 뉘앙스를 풍긴다. 언젠가 마트에서 쇼핑하는 걸 좋아하게 되고, 카트 끄는 일이 익숙해진다면 꼭 한번 쓰고픈 사물이다.

또 하나 써보고 싶었던 것은 등산하는 이들의 뒷모습이다. 이건 뭐 디자인도 사물도 아니지만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가장 ‘살아 있는 이미지’로 내겐 보인다. 발가락이 바위에 많이 치였던 험난한 관악산을 등반했던 겨울날, 관악산 최정상에서 아슬아슬한 고개를 넘어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건 (보카치오)의 여섯 번째 날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야기 잔치에 소개되어도 괜찮을 장면이라 생각했다. 추리닝 차림에 가뿐가뿐 널뛰기를 하듯이 산 정상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중년 남성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이들의 기운을 제대로 써먹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산이 많은 도시 서울에서 등산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라. 아슬한 낭떠러지만을 굳이 찾아가 그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담대한 장면은 오늘날의 대표적인 풍경사진일 것이다.

세계가 움직이는 데서 자기도 빠지지 않고 나름 활발히 작동하는 커피전문점의 ‘진동벨’도 써보려다 말았다. 커피가 주문되면 ‘이리 오라’고 말하는 진동벨에는 요새 광고 동영상도 담긴다. 진동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조만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디자인 또는 사물과 결합한 ‘진동’은 진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인간을 ‘친진동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진동은 목소리와 손짓을 대신한다. 감기에 걸려 잠들어 있는 가족을 보며 이마를 만지는데, 왠지 ‘진동’ 신호가 느껴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너의 의미 안녕.

독립 큐레이터

* ‘현시원의 너의 의미 2’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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