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시인 이상이 죽기 직전 먹고 싶었던 과일은 ‘레몬’이 아니라 ‘메론’이었다. 아내 백동림은 이상이 먹고 싶어 했던 건 당시 가장 구하기 힘들었던 메론이지 레몬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상한 모양의 과일처럼 이국적인 건 없으니까, 시인은 지금 별난 과일이 풍성한 세계에 살고 있을 듯하다. 죽기 직전의 나는 어떤 과일이 먹고 싶을까? 그것보다 후손에게 내 뜻이 잘 전달될지 의문이다. 조상님께 바치는 명절 차례상을 보며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 상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할머니는 캐러멜맛 사탕을 좋아했고, 나와 ‘감자칩’을 먹으며 책을 읽고는 하셨는데. 상에는 노란 포와 대추가 보인다. 왠지 명절 차례상에 올라간 음식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너무도 옛날 옛적의 ‘어른들’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가가호호 제 입맛에 맞는 음식과 조리법, 그릇의 배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홍동백서, 어동육서, 좌포우혜라는 ‘법도’가 있지 않은가. ‘붉은 과일은 동쪽에 놓고 흰 과일은 서쪽에 놓아라.’ 여기까지 들으면 비밀스러운 책략을 음식에 비유한 고독한 시인의 문구 같다. 생선은 동쪽에 놓고 고기는 서쪽에 놓아라. 왼쪽에 포를 오른쪽엔 식혜를 두어라. 이쯤 되면 명령이고 지침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명절 차례상을 차리는 법도인 홍동백서·어동육서·좌포우혜는 조선시대의 (朱子家禮)에서 비롯된 상 디자인 비법이다. 대추와 밤, 배와 감의 자리를 정하는 ‘조율이시’는 과일에 담긴 ‘씨앗’의 개수에 따라 서열을 정한 것이라 하니 지으신 분 참으로 꼼꼼하시다.
성리학을 완성시킨 조선 후기 양반들의 자존심이던 상차림은 정갈 있는 ‘에티켓’으로 변모했다. 명절 때면 신문 지면에 차례상 배치도가 꼭 실렸다. 이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사진)에 실린 상차림 배치도를 본다. 멋진 전시라는 평가를 받은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무명’(unnamed)에는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사물이나 행동 양태, 또 기존 디자인 장르에 포섭되지 않는 여러 사물들을 보여줬다. 오랜 기간 내려온 차례상 ‘배치도’야말로 흥미로운 무명 디자인으로 한 공간을 차지할 만하지 않은가? 이름 없는 무수히 많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이자 며느리인 주부의 뇌 한쪽을 차지하는 기억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 상륙을 앞둔 세계 최대 가구업체 ‘이케아’가 전세계에 전파시켜 마지않은 ‘DIY’(Do it yourself) 정신과 이 배치도의 활용법은 맞닿아 있다.
을 쓴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작업 매뉴얼의 경우 “일러주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도제들이 물 먹는 하마처럼 마스터를 따라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니고 “제 상상력 활용”을 오랫동안 즐겨왔다는 것이다. 그림과 지침을 보고 무언가 배치하는 방식은 ‘홍동백서’와 ‘이케아’ 모두 비슷하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 과일이기 때문에 차례상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독립 큐레이터 sonvadak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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