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제주도를 걸었다. 눈이 쌓인 ‘사려니 숲길’을 걸을 때는 너무 열정적인 동행자에게 “이거 극기훈련이야?”라고 묻고 싶었다. 우리 빼곤 아무도 없는 숲길에서 귤이나 까먹고 있던 순간 팔딱팔딱 뛰는 노루들을 보았다. 꼭 두 마리씩 짝지어 나타났는데, 한 놈은 냅다 뛰고 한 놈은 가만히 나무 옆에 서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식이었다. 신비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내 탁한 눈이 깨끗해지는 듯했다. 어떤 길을 걸어도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풍성한 제주도였다.
보고 싶지 않은 반전의 풍경도 있었다. 해군기지 건설 공사가 진행되는 서귀포 강정마을이었다. 월평포구에 이르는 아름다운 제주올레 7코스 위로 탐정영화의 맥거핀(Macguffin·속임수, 미끼)처럼 경찰이 하나둘 등장하더니 바다를 품고 있던 왼쪽 길이 뚝 끊겼다. 흙탕물을 튕기며 커다란 차들이 거칠게 지나갔다. 물이 좋고 자라는 벼가 튼실하고 맛깔스러워 ‘제일강정’이라는 애칭이 붙은 마을의 바다 쪽 땅은 황폐하게 파헤쳐진 상태였다. 마을과 해안가 공사 현장을 가로막고 있는 펜스 위로 철조망이 보였다.
포물선을 그리는 이 날 선 장치는 무엇인가. 철조망은 적군의 침입이나 접근을 저지하는 데 쓰이는 물건이다. 만지면 피가 날 것 같은 긴장감은 물론이고 찌리릭 전기에 감전될 것 같은 겁주기 효과마저 있다. ‘장벽 철폐’ ‘프리’(Free)가 넘쳐나는 시대에 웬 철조망이란 말인가. 철조망은, 이를 사이에 두고 뽀뽀하던 드라마 의 한 장면에나 어울리는 낡고 부담스러운 사물이다. 철조망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조지프 글리든이라는 13살의 목동이 ‘가시철조망’(가시 달린 철사) 특허를 낸 뒤 사유재산권의 상징이 되었다. 매듭과 철가시가 반복되는 철조망 형태는 장미 가시에서 힌트를 얻었다. 전쟁터·군부대·감옥 등 무수히 많은 공간에 적용됐고, 소년 글리든은 철조망 공장에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작은 발견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철조망은 바다를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고, 강정을 지키려는 목소리에 바리케이드를 친다. 강정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폭력적인 발상에서 철조망이 주인공은 아니다. 가시를 품고 있고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달고 있다지만 그래봤자 조력자일 뿐이다. 하지만 강정마을의 철조망은 조력자이기에, 우리 시선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에서 “사물들 중에도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고 적었다. 쓸모없고 창피한 물건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이 조력자 사물들은 고집스럽고 무지막지하게 폭력적인 어떤 사건들을 더 잘 돕는다. 조력하는 사물은 우리를 따라다니는 무수히 많은 기억과 관계하며 쉽게 잊히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공사판과 철조망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이 땅의 한편에선 철조망을 없애는 일이 진행된다. 동해안의 여섯 개 시·군은 2006년 군경계철조망 45.5km를 제거하는 데 106억원의 지방비를 투입하기도 했다. 철조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강정 해안을 걷고 또 볼 수 있었을까. 8명의 감독들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에서나마 철조망 때문에 닿지 못했던 강정의 여러 모습과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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