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다. 언제부터인가 미리 짐 꾸리기를 포기했다. 출발 30분 이전에 가방을 챙기지 않는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여행은 훌쩍 떠나는 게 제격이다. 미리 궁리하며 짐을 꾸려봐야 짐만 는다. 짐은 언제나 짐이 된다. 빠뜨린 게 있으면 현지에서 해결하면 된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그곳에 다 있다. 출발 직전에 꼭 필요한 물건만 생각나는 대로 담는다. 공식 일정이 있으면 여행용 가방을, 공식 일정이 없으면 배낭을 이용한다. 어느 경우든 최소한의 부피와 무게로 한다.
지난주에 베트남 서북 산악지역인 사파에 다녀왔다. 일행 10명 중에서 내 배낭이 제일 작았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내 배낭에 다 있었다. 침낭과 우의를 챙겨간 건 나뿐이었다. 침낭은 야간 침대열차에서, 따핀 마을의 자오족 민박집에서, 돌아오는 침대버스에서 톡톡히 몫을 했다. 우의는 종일 비 오는 산길을 걷는 동안 특히 요긴했다. 짐이 다른 사람의 반도 안 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걸 다 챙긴 건, 여행에 도가 터서도 아니다. 사파를 대충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는 여행을 할 때도 뭘 많이 챙기지 않는다. 모르면 아무리 이것저것 챙겨봐야 소용되는 게 없다.
아무리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서더라도 더운 나라를 갈 때 현관에서 집어넣고 가는 것이 하나 있다. 고무 샌들이다. 이 샌들은 베트남의 친구 반레가 선물로 준 것이다. 그가 호찌민 루트를 타고 다니며 10년 가까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샌들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가 자주 신는 신발이다. 얇고 가볍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로부터 두 번째 얻은 샌들이다. 오래전에 그로부터 받은 샌들이 떨어져 다시 베트남에서 사려고 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 얘기를 들은 그가 다시 한 켤레 구해주었다. 이 샌들을 신고 발걸음을 옮길 때면 나는 그가 이런 샌들을 신고 정글을 누비던 시절의 감촉을 발바닥으로 어렴풋이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살아간다. 홀로 걸어간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짐을 미리 꾸리지 않자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바빠서? 시간이 그런지 마음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귀찮아서? 어디에서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기 어려워서인지 새로운 것에 대한 내 호기심이 시들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주머니 속의 수첩에는 세계지도가 붙어 있다. 사용해야 하는 수첩에 지도가 붙어 있지 않아 다른 수첩의 것을 오려다 붙인 것이다. 사는 것이 심드렁해질 때 나는 이 작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내가 밟았던 대지의 기억을 발바닥으로 떠올려본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의심스러울 때 나는 미뤄둔 방문지의 위치를 지도 속에서 더듬는다. 떠나고 싶은데 떠나지 못할 때 나는 고무 샌들을 꺼내 신고 동네를 서성이며 소줏집을 물색한다.
방현석 소설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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