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감쪽같은 조작, 표정 관리하는 극우정당

수십만 개 허위 계정으로 교묘한 거짓 정보 확산… 외국인 혐오 등 의도 먹혀들어
등록 2025-02-15 15:44 수정 2025-02-19 03:56
2025년 2월11일 독일 뒤셀도르프 거리에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 대표(왼쪽)와 올라프 숄츠 총리의 사진을 담은 대형 선거 광고판이 내걸려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2월11일 독일 뒤셀도르프 거리에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 대표(왼쪽)와 올라프 숄츠 총리의 사진을 담은 대형 선거 광고판이 내걸려 있다. AP 연합뉴스


“거짓말은 때로 현실보다 더욱 그럴듯하고, 이성에 호소하는 바도 크다. 거짓말쟁이는 자기 거짓말을 듣게 될 사람이 듣고 싶어 하거나 기대하는 게 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71년 11월18일치 ‘뉴욕리뷰오브북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담은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독후감 격인 기고문은 각주를 포함해 16쪽 분량으로, ‘정치와 거짓말’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는 “작금의 지식인 세대는 정치의 절반은 ‘이미지 만들기’고, 나머지 절반은 그 이미지를 사람들이 실제로 믿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배우며 자랐다”며 “정치 영역에서 비밀스러움과 의도적 속임수는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자기기만이 가장 위험하다”고 썼다.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 걸까?

 

일론 머스크의 ‘엑스’도 유통 온상

정치와 거짓말의 상관관계를 가장 잘 활용한 정치인으로 단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꼽힌다. 워싱턴포스트는 2021년 1월24일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동안 내놓은 과장 또는 거짓 주장이 모두 3만573건에 이른다고 전했다. 4년 내내 하루 평균 약 21건씩 ‘가짜뉴스’를 쏟아냈다는 뜻이다. 그가 내놓은 말은 소셜미디어란 ‘증폭기’를 거쳐 신뢰도와 영향력을 얻었다. 비슷한 현상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내란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한국이 그렇고, 조기 총선을 코앞에 둔 독일도 그렇다. 2025년 2월23일 총선을 앞둔 독일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올라프 숄츠 총리도 갖고 있다. 프란치스카 브란트너 녹색당 공동대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수백만달러짜리 대저택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1월28일 최근 소셜미디어를 타고 번진 이 뉴스가 가짜라고 보도했다. 숄츠 총리 등이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힐스 지역의 고급 빌라촌에 있는 대저택을 사들였는데, 최근 그 일대를 휩쓴 대형 산불로 전소됐다는 내용의 이 가짜뉴스는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을 찍은 사진과 함께 위치를 알려주는 구글 지도까지 버젓이 등장하면서 확산됐다. 선거를 앞두고 근거 없는 거짓 정보를 유통하는 의도는 명확하다. “잘나가는 정치인들이 국민의 믿음을 배신하고, 거액을 외국으로 빼돌려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공개 지지하고 나선 세계 1위 갑부 일론 머스크가 소유한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도 가짜뉴스 유통의 온상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캐머론’이란 이름의 정복 차림 경찰이 화면에 등장한다. 그는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경찰 생활을 하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월 조기 총선을 앞두고 독일에서 일련의 대형 테러가 준비되고 있다는 첩보를 영국 경찰이 입수했다”고 주장한다. 이어 “이 영상을 가족·친구들과 공유해달라”고 덧붙인다. 슈피겔은 가짜뉴스 대처 단체 ‘안티봇4나발니’의 자료를 따 “해당 영상은 원본 영상에 인공지능(AI)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 음성을 덧씌워 조작한 것”이라고 전했다.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대표가 2025년 2월9일 하이덴하임에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대표가 2025년 2월9일 하이덴하임에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러시아발 ‘도플갱어’ 활동 폭증

“푸틴의 허위 정보 네트워크가 소셜미디어에 가짜뉴스를 쏟아부으며 독일 선거 판세를 뒤흔들고 있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2월6일 독일 외교부의 보고서 내용을 따 이렇게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러시아 쪽은 자국에 유리한 막대한 양의 거짓 정보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뜨리며 ‘정보 전쟁’에 골몰해왔다.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독일은 자연스레 ‘표적’이 됐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공세 수위는 높아졌다. 폴리티코는 러시아발 가짜뉴스 생산과 유통의 핵심으로 이른바 ‘도플갱어’(누군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나 동물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꼽았다.

도플갱어는 소셜미디어에 개설한 수십만 개의 가짜 계정(봇)을 동원해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쥐트도이체차이퉁·슈피겔·빌트 등 유력 매체의 공식 계정인 것처럼 속이거나, 조작된 정보를 담은 가짜뉴스 링크를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식이다. 독일 외교부 쪽은 “도플갱어 네트워크는 상당한 수준까지 자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정 기간엔 하루 수천 개의 계정이 대단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막대한 양의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고 짚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도플갱어의 활동도 왕성해지고 있다. 폴리티코는 “2024년 11월과 12월 하루 평균 50여 건에 그쳤던 독일어로 된 가짜뉴스가 2025년 1월 들어 폭증하고 있다”며 “1월 말엔 하루에 3천 건씩 가짜뉴스가 올라오고 있다”고 전했다.

가짜뉴스라고 내용이 100% 거짓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독일 국민의 연금이 우크라이나에서 불타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정책 탓에 독일은 곧 기근에 직면할 상황”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부메랑이 돼 독일 경제를 위협한다. 결국 대가를 치르는 건 독일 국민” 등속의 과장·선동성 기사도 있다. 이런 내용은 도플갱어를 통해 불과 몇 분 만에 수백 개의 리트위트가 집중되면서 널리 퍼진다. ‘절반의 진실’로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해, 극단적인 사회적 논쟁을 부추기려는 의도로 보인다.

독일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가짜뉴스도 있다. AfD가 2024년 12월18일 엑스 공식계정에 올린 시리아 난민 관련 내용이 대표적이다. 당시 AfD 쪽은 “시리아 출신 망명 신청자 가운데 단 0.5%만 받아들여졌다. 가짜 난민은 계속 추방해야 한다. 새로운 통계자료는 독일로 온 시리아인은 모두 난민이란 주류 정당의 주장이 환상일 뿐이란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1월29일 이 주장을 ‘허위’라고 규정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반이민 정서에 가세한 기독민주당

독일 내무부의 자료를 보면, 2024년 10월31일을 기준으로 독일에 거주하는 시리아인은 약 97만5천 명이다. 이 가운데 정치적 망명자로 공식 인정된 사례는 AfD의 주장처럼 전체의 0.5% 수준인 5천 명 남짓에 그친다. 문제는 AfD가 난민과 관련해 핵심적인 사실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점이다. 방송은 조피 마이너스 독일외교협회 연구원의 말을 따 “AfD의 주장은 정치적 망명이 독일 정부가 운영하는 난민 보호제도의 극히 일부분이란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위다. 난민 중에서도 가장 보호 지위 부여율이 높은 게 시리아 출신자”라고 전했다.

2025년 2월9일 독일 하이덴하임에서 시민들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2월9일 독일 하이덴하임에서 시민들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독일의 난민 보호제도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거나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른바 ‘보충적 보호’나 ‘강제출국 금지’ 대상자로 지정해 일정 기간 체류·노동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방송은 “2023년 말까지 시리아 출신 난민의 88%가 일정한 보호 지위를 부여받았다. 대부분은 (출신국에서 신변에 위협을 당했거나 귀국해도 출신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1년간 체류 및 노동권을 보장하고 이후 심사를 거쳐 2년씩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보충적 보호 대상자로 지정됐다”고 전했다.

왜 거짓 주장을 내놨을까? AfD의 주장을 뒤집으면, 독일 거주 시리아인의 99.5%가 불법체류자란 얘기가 된다.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외국인 혐오증을 조장하고, 불법이민 문제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먹혀들고 있다. 선거를 한 달여 앞둔 1월22일 바이에른주 아샤펜부르크의 공원에서 추방 대상자인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흉기를 휘둘러 2명이 숨졌다. 희생자는 교사 인솔 아래 산책을 나온 2살 어린이와 흉기 난동을 막으려던 40대 주민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반이민 정서가 들불처럼 번졌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 대표 주도로 의회에서 이민제도 강화를 위한 결의안이 추진됐다. 국경 상시 통제와 적법한 서류를 갖추지 못한 외국인은 망명 신청 여부와 무관하게 입국을 차단하는 내용이 뼈대다. 메르츠 대표는 “좌우 가리지 않고 앞만 보겠다. 누구의 도움을 받든 이민정책 변화는 당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극우정당과의 방화벽도 흔들

1월29일 CDU가 제출한 결의안이 의회에서 찬성 348표, 반대 345표, 기권 10표로 채택됐다. AfD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가능한 일이었다.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메르츠 대표는 연방경찰이 불법체류자 구금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기존보다 이민제도를 대폭 강화한 이른바 ‘유입제한법’을 1월31일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찬성 338표, 반대 349표, 기권 5표로 부결이었다. AfD의 지원을 받은 것에 반발한 CDU 소속 의원들이 이탈표를 던진 탓이다.

‘브란트마우어’(방화벽)라 불린다. 나치 패망 이후 독일 정치권은 극우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극우정당과 일체의 협력도 거부하는 걸 전통으로 삼아왔다. 메르츠 대표는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결의안 통과 과정에서 AfD의 지원을 받은 것 자체가 ‘방화벽’을 허무는 짓이란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CDU의 지지율은 소폭 하락했고, AfD의 지지율은 그만큼 상승했다. 2월4일 실시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 CDU는 지지율 30%로 1위다. 2위는 22%를 기록한 AfD, 사회민주당(SDP)과 녹색당은 각각 17%와 13%로 그 뒤를 이었다. AfD의 지지율이 20%대를 넘어선 것은 2013년 창당 이래 처음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