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앞둔 저녁 시간, 와잎이 전활했다. “약속 없지? 일찍 들어와, 할 얘기가 있어.” 싸늘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왜 그러지? 지난주 회식 있다고 거짓말하고 친구놈이랑 술 마신 걸 알았나? 와잎 몰래 지르고 숨겨놓은 리영희 전집을 발견했나? 시기적으로는 작년부터 내용적으로는 거짓부렁에 의도적으로 말 안 한 것까지, 내 행적을 훑고 또 훑었다. 알코올성 치매라 지난주 쓴 기사도 생각이 안 나는데, 작년에 거짓말한 것까지 복기하려니, 갑자기 또 술이 먹고 싶어졌다. 문득 리영희 선생의 책 제목 이 떠오르며, 에라 모르겠다, 선배들 따라 나도 모르게(!) 회사 앞 호프집으로 향했다. 연거푸 두 잔째 들이키는데 전화가 왔다. “안 오나?” “어… 지금 출발했어.” 자유고 나발이고,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집에 도착해보니 와잎의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이거 예상보다 센데. 혹시 술이 떨어졌나? 그럴리가. 쌀은 떨어져도 술은 안 떨어지는 집인데 그럴리가. 혹시 그때 그 일? 안 돼!!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뭐라고 둘러대지? 그냥 묵비권을 행사해? 아님 희생양을 만들어?) 머릿속의 슈퍼컴퓨터가 다시 부팅하는 순간, 와잎이 말했다. “씅이 결혼한대. 라스베이거스에서.” 씅이라면 와잎의 초등학교부터 고교 시절까지 함께 보낸 베프? (놀랬잖아~. 누구 마음 졸이다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 나 몰래 보험이라도 들어놨냐.)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휴~ 살았다.) 와잎은 뭐가 좋아서 실실 쪼개냐고 했다. “좋지, 노처녀가 결혼한다는 데 경사가 따로 없잖아.” (앗싸! 나야말로 경사가 났구나.) 와잎은 퉁퉁 부은 얼굴로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재미동포랑 결혼하는 씅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니 당신이 애 좀 돌봐.” 물론 그러려면 1주일의 휴가가 필요할 것이라는 살뜰한 당부도 함께. (경사는 니가 났구나. 너도 하면 안 되겠니? 결혼!)
몇 주 뒤, 조촐한 한국 결혼식을 하러 물 건너온 씅의 남자를 함께 만났다. ‘보쌈·족발·감자탕 매니아’(줄여 ‘보매’)라는 그를 위해 와잎은 서초동 ‘옛날보쌈’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다. 마취과 의사라는 그는 역시나 보매에 어울리는 푸근한 인상이었다. 한국어가 서툰 그가 보쌈김치에 고기를 먹으며 “맛있어~ 맛있어”를 연발했다. (누구냐? 넌! 재미동포 맞냐?) 나도 덩달아 한 점 맛보니 부드러운 육질에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 촉촉히 스며들었다. (맛은 있네.) 무말랭이를 곁들인 보쌈김치는 달았고, 같이 내온 열무김치는 아삭했다.
와잎은 급다운받은 번역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매리드 투 마이 베스트 프랜 이즈 새드”라고 되도 않는 영어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씅의 남자에게 소폭을 말아줬다. (너, 라스베이거스 가기 싫으니?) 씅의 남자는 영어로 뭐라뭐라 길게 말했다. 와잎은 고개를 끄덕이며, “택 잇 이지~ 고어 헤드”를 반복했다. 이윽고 씅의 남자는 원샷을 했다. 와잎은 “평소에 소맥 먹고 싶었다는 말이었구먼” 하고 내게 속삭였다. (니가 귀가 트였구나~.) 그날 씅의 남자는 소폭 열두 잔을 마시고 전신마취된 듯 씅에게 업혀 갔다. (와잎이 마취과 의사였구나~. 닥터 K구먼, 하얀보쌈거탑.) 와잎은 예비신랑을 업고 가는 씅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난 조국에서 임자 제대로 만나 마취의 궁극인 떡실신을 경험한 보매의 안위를 빌었다. 문의 02-58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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