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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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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글로벌하게, 영화는 로컬하게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정서 보여줘…
수도권 집중화의 시대, 지역 고유문화에 밀착한 작업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등록 2011-10-14 10:57 수정 2020-05-03 04:26
왼쪽부터 <위도> <뽕똘> <어기그, 저 귓것>

왼쪽부터 <위도> <뽕똘> <어기그, 저 귓것>

“서울 노원구 공릉동, 월계동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나꼼수’에서 이 멘트가 웃긴 이유는 ‘화자의 꼼수’ 때문이다. 소선거구를 채택하는데다 지역감정마저 작동하는 한국의 정치인에게 지역 기반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으랴. 지역 기반은 영화에서도 중요하다. 선거판의 표심이나, 박스오피스의 티켓심이나 다르지 않다. 화면 속 장소, 인물, 언어는 친숙함과 낯섦을 가르는 요인이다.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 제쳐두고 다소 미진한 한국 영화를 보는 이유는,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친숙함 때문이다. 이를 문화적 낙차라고 하는데, 외국 영화라도 같은 인종과 비슷한 풍경이 나오는 아시아 영화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영화의 지역성은 우선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필요하지만,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판타지 장르를 비롯한 일부 영화에선 일부러 ‘탈장소성’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영화는 구체적 지역성을 띨 때 메시지나 질감이 더 또렷해진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영화는 지역성을 통해 오히려 보편성을 얻는다.

오멸 감독의 <뽕돌>(위)과  <어이그 저 귓것>은 제주 토박이의 시선으로 중심과 변방의 사고를 전복한다. (주)영화사 진진 제공

오멸 감독의 <뽕돌>(위)과 <어이그 저 귓것>은 제주 토박이의 시선으로 중심과 변방의 사고를 전복한다. (주)영화사 진진 제공

여행자의 시선 아닌 현지 정서 녹아들어야

영화의 지역성을 시장 차원에서 고찰하게 한 영화가 였다. ‘부산’은 영화 속 주제인 ‘2인자성’과 맞물려 관객을 모으는 키워드였다.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사는 대한민국에서 부산은 비수도권의 대표적 표상이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부산에 영화적 인프라가 확충되고 투자가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이후 등 부산의 풍경과 정서를 담은 영화가 많이 나왔다.

인천은 의 배경이 된 도시다.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프로축구단을 그린 이나 인천의 록밴드를 그린 은 인천 특유의 변방성과 소외감을 담고 있다. 가장 감각적인 멜로를 찍는 허진호 감독의 와 은 강릉과 삼척을 구체적인 장소로 삼는다. 이후 의 영월이나 의 횡성도 중요한 장소성을 갖는다. 그러나 외지인이 바라보는 풍광이 아닌 현지인의 정서가 담긴 강원도 영화로는 를 꼽을 수 있다. 는 ‘온성’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하지만, 충청도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씨는 영화에 고유한 정서를 불어넣으며 지역성을 입힌다. 반면 홍상수의 은 충남 태안 신두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만 지역성을 품진 않는다. 는 아예 경남 통영의 모든 장소를 낱낱이 보여주지만 역시 여행자의 시선이다. 그러나 의 서울은 다른 느낌이다. 서울을 수도가 아닌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만이 밀착할 수 있는 정서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영화 속의 장소가 지역성을 띠려면 현지인적 정서가 녹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극명한 지역성을 띠는 영화는 오멸 감독의 영화다. (2009)과 (2009)은 제주도의 풍광을 소비하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곳의 자연과 전설을 나의 무의식으로 삼는 토박이의 시선이 담긴 영화다. 은 서울말로 ‘어이구, 저 화상’쯤 되는 말이다. 제목이 그러하듯, 영화는 모조리 제주 방언, 아니 현지어로 돼 있다(방언이란 말도 서울 중심의 사고가 담긴 정치적 용어다). 에선 아예 서울에서 온 배우에게 “언어가 안 된다”며 타박한다. 은 일 안 하고 노닥거리는 남자들을 그린다. 제주 남자들이 한량이라는 건 꽤 회자되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유배 온 양반들을 제주 비바리들이 물질과 농사로 먹여살린 데서 유래했다는 속설도 있다. 영화는 제주 남자들의 한량 짓을 통해 느긋함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은 음악영화이기도 하다. 제주민의 삶을 현지어로 노래한 가수 양정원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주연을 맡았다. 질박하고 여유롭다. 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다. 도저히 영화를 만든다는 게 가당찮아 보이는 현지인들이 서울에서 온 여행자를 배우 삼아 ‘낚시영화’를 찍는다. 배우를 절벽에 세워두고 하염없는 ‘기다림’을 설파하던 그들은, 강태공의 ‘미끼 없는 낚시’가 세월을 낚듯 테이프 없는 카메라로 사람을 낚는다. 영화가 아닌 영화 만들기의 행위만 남는 과정. 영화가 ‘자파리’(서울말로 ‘저지레’)라 부르는 이 과정을 통해, 서울에서 온 여행자 역시 그들의 삶의 방식에 전염된다. 영화는 현지인 제작자와 외지인 배우를 통해 중심과 변방의 사고를 전복한다. 영화는 산방산 아래 해안 등 절경을 보여주지만, 풍경에 감탄하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연과 함께 살아온 현지인의 시선을 취한다. 이를 배창호 감독의 (2009)과 비교해보면 극명해진다. 시종 관광객의 시선으로 제주를 담은 에서, 제주는 여느 관광 홍보 동영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은 한국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만들기 프로젝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진흥개발기금을 지원받아 제작한 영화다. 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시즌 작 은 그나마 낫다.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대구를 배경으로 찍은 이 소품은 대구와 육상대회를 재치 있게 엮으며 밉지 않게 대회를 홍보한다.

개봉을 앞둔 <위도>는 실제 위도에서 올로케이션한 지역 영화지만 현지 정서의 결을 완벽히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  건시네마 제공

개봉을 앞둔 <위도>는 실제 위도에서 올로케이션한 지역 영화지만 현지 정서의 결을 완벽히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 건시네마 제공

지방성 넘어 지역성으로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홍보를 위해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임권택 감독의 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하고 전주시청 등이 지원한 영화다. 영화 속 전북 전주는 한지 제지술을 비롯한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고장이자 고즈넉한 달빛이 비추는 곳으로 그려진다. 인위적이고 과도하게 강조된 지역성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삼투되지 못한다. 반면 개봉을 앞둔 는 전북영화제작 인큐베이션 배급지원작으로 실제 위도에서 올로케이션한 영화지만, 어느 섬이었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지역성이 없는 실패한 지역 영화 프로젝트다. 그러나 지역 영화 프로젝트는 다른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로컬시네마 전주’라는 섹션을 두고, 전주에서 지역 영화를 찍는 감독의 작품을 소개한다. 을 찍은 함경록 감독은 전주 우석대를 나와 전주에서 영화를 찍는다. 도 감독이 전주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영화 교육을 하다가, 지역 방송사가 다룬 전북의 실제 사건에서 착안해 만든 영화다. 이처럼 외지 제작진에게 로케이션 장소를 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을 지원·육성해 이들이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 지역 고유의 문제와 정서에 밀착한 영화를 찍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지역 영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거대 수도권과 아무런 차별성 없이 모두 ‘지방’으로 불리는 비수도권으로 양분된 사회에서, 지역성은 말살되고 변방과 저개발의 지방성만 남는다. “서울 사람 맞다케도~”부터 “완전 다르거든~”까지, 수년째 사투리 교정 개그가 흥하는 건 수도권 집중화로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탓이리라. ‘생각은 글로벌하게, 행동은 로컬하게’라는 말이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자치적 문화 활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지역 영화 성장세 이어가려면
유치 경쟁 넘어 지역 영화 만들기에 공들여야
지역 영화의 봄은 올까. 지역 영화 촬영을 지원하는 각 지역의 영상위원회 자료를 보면 성장세가 뚜렷하다. 인천을 보면 올해 들어 인천영상위원회 지원을 받아 인천에서 촬영한 장편 극영화가 24편이다. 지난해 인천 지역에서 촬영한 장편 극영화가 12편이었던 것에 견줘 올해는 2배 더 많은 영화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다큐멘터리, TV 드라마, CF까지 포함한다면 10월4일까지 52개 작품이 인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블록버스터 영화 에서 멜로영화 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수도권이자 항만·공항 시설을 품고 있다는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북 전주 지역도 영화 촬영 유치에 공을 들였다. 지난해에 장편 극영화 17편이 전북에서 촬영을 진행한 데 비해 올해 9월30일까지 전북을 다녀간 영화는 26편이다. 이 중엔 같은 영화도 포함돼 있다. 전주영상위원회 쪽은 “한국 영화가 전반적인 침체 분위기를 벗어나는 여파가 전주에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주영상위원회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은 하지 않고 제작비 10억원 이상 되는 영화들을 지원한다.
부산 지역은 부산 지역 영화가 드디어 바닥을 딛고 이제 회복세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완연하다. 부산영상위원회 자료를 보면, 올해 상반기 부산영상위원회가 지원해 부산 지역에서 촬영한 장편 극영화는 총 12편, 촬영한 날짜는 263일이다. 지난해에는 10편에 149일 촬영으로 촬영일만 비교하면 76.5% 늘어났다. 부산영상위원회 쪽은 제작 편수가 늘기도 했지만 과 같이 전체 분량의 70% 이상을 부산에서 촬영하는 ‘올로케이션’ 영화가 늘어난 사실에 의미를 둔다. 영상위원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부산이지만 지역 영화의 위기를 반영하듯 스크린에서 비중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위원회의 유치 편수가 지자체의 경쟁을 넘어 지역 영화 만들기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영상위원회가 촬영 일수와 편수 기록보단 지역 독립영화 쪽에 치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이석 부산독립영화협회장은 “영화제나 이벤트 행사에 무게가 쏠려 몇 년이 지나도 영화 제작 지원 액수는 부동자세”라며 “서울에 있는 영화사를 유치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지역 영화를 지원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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