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에 칼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다. 영화 , 연극 , 드라마 등 무협물들이 각기 무공을 선보이고 있다. 기개도 드높다. 영화 은 지난 9월13일 개봉 35일 만에 관객 수 600만 명(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600만2260명)을 돌파했다. 9월6일 서울 남산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은 8일째 전석 매진, 실제 좌석점유율 95%를 넘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드라마 는 특별한 호적수가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지난 9월13일 방영에서도 시청률 16.9%(AGB닐슨미디어리서치 집계)로 월·화극 1위 자리를 지켰다. 현대전에선 쓸모없게 된 활과 검이 문화적으론 첨단 무기가 된 비결은 잘 짜인 만듦새 덕분이고 관객의 판타지를 겨누고 있기 때문이리라.
<font size="3"><font color="#006699"> 일합, 일그러진 역사를 향해</font></font>영화 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의 격랑에 휩쓸린 남매의 이야기다. 인조반정 당시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숨질 때 오빠 남이(박해일)는 동생 자인(문채원)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위해 그는 활 한 자루를 들고 청나라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동생을 구하러 나선다. 영화 속 남이의 활에 새겨진 ‘전추태산 발여호미’(앞은 태산처럼 무게를 두고 시위는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 쏘라)라는 글귀는 이 영화의 좌우명이 아닐까. 절망적인 시대와 청나라 팔기군대라는 태산 같은 적수들 덕분에 활시위는 한층 팽팽해진다. 서사의 빈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영화는 고수들이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점점 육중해지는 것으로 말을 대신한다.은 무장들의 영화다. 소설가 김훈이 그렸던 “임금의 칼과 적의 칼 사이에서 몸 둘 곳이 없는” 무장의 슬픔은 주인공의 운명이기도 하다. 지금 역사 드라마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 시대 대중의 욕망 구조를 반영하는 장르라는 분석이 있다. 이 노리는 욕망의 지점은 이렇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50만 명이 잡혀갔다. 정부의 송환 노력은 없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기댈 곳 없는 시대지만 활은 정직하게 적의 심장을 노린다. 참혹한 역사 현장에서 피어나는 무장의 슬프도록 화려한 순간이 소시민적 삶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무한다.
드라마 는 영·정조 시대를 향한다. 사도세자가 실은 북벌론을 추진하다 암살당했다는 설정에서 보듯 이 드라마는 명백히 역사 다시쓰기의 욕망을 드러낸다. 등 수많은 역사 드라마가 되풀이해서 노렸던 시대다. 문무를 고루 갖춘데다 정치적 기개마저 높았던 훌륭한 임금,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혁명의 꿈은 수없이 반복 재생산돼왔다. 계급적 운명이나 현실의 모순과 맞닥뜨리는 긴장감을 키우는 데 ‘실패한 역사’라는 모티브는 중요하다. 를 공동 연출하는 김홍선 PD는 “그 시대에 무인으로 산다는 것을 형상화하고 싶었다. 시대에 발붙이지도 못하고 도나 의리를 무시하고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는 검으로 자신의 로망을 이루려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이합, 절대무공 강자를 가려라</font></font>
는 무협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다. 살생에 거리낌 없는 자객집단 흑사초롱의 천주(최민수)와 검선이면서도 명분과 의리를 위해 팔 한쪽을 내주는 김광택(전광렬)의 대결도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무협의 이분법에 충실하다. 드라마 속 효종이 남겼다는 ‘북벌지계’를 둘러싼 추격전은 무협소설에서 흔히 벌어지는 무공비급을 둘러싼 갈등과 유사하다. 그 비급을 얻은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는 검을 쥔 자에게 “운명에 휩쓸리지 말고 운명을 뛰어넘으라”고 충고하지만 피를 묻혀야 하는 것이 검의 운명 아니던가. 연극 은 순진한 무협의 꿈을 뛰어넘는다. 2천 년 전 영생이란 말에 매혹당한 중국의 황제는 의원에게 3천 명의 동남동녀를 주어 영생의 낙원을 찾도록 한다. 이들을 지키던 무사 케이는 의원의 잔인한 실험 때문에 혼자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다. 남의 목을 베고 또 베어야 하는 허무하고 지루한 영생이다. 복숭아꽃 날리는 무대 한편에는 저승으로 가는 구멍이 항상 입을 벌리고 있다. 죽여도 죽여도 검객들은 다시 칼을 들고 기어나온다. “그들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에요. 소녀도 의원도 이미 죽은 사람일 수도 있죠. 구천을 떠도는 사람들처럼 한순간의 삶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조광화 연출자의 말은 이 절대 고독의 경지에 다가설 유일한 단서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유치장에서 구류 5일을 살아본 일이 있는데 거기서 견디는 방법이 일체의 상념을 지워버리는 것밖에 없더라”며 “검객들에게 흙을 온몸에 바르고 시체에게 둘렀던 가마니를 입힌 이유가 절체절명의 고독한 세월 동안 빛이 바래버린 진시황릉의 병마총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목검이고 실제로 주먹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연극은 무술이 예술적 행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동안 카메라에 가려졌던 것은 검의 살기가 아니라 검을 잡은 자의 체온이었을지 모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최종승부, 반복이 아닌 진화를 위해</font></font>은 활이라는 무기를 십분 이용한 빠르고 영리한 액션을 추구한다. 은 상대를 베는 순간에 오히려 시간이 멈춘 듯, 호흡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려진다. 순간 날카로운 음향이 관객의 귀를 찌른다. 쉭! 사람의 몸짓과 음향이 합쳐서 영화의 슬로모션에 버금가는 효과를 자아낸다. 두 작품은 액션의 전범을 만들어낸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 드라마가 품어온 이 꿈은 진화하고 있는 걸까. 는 아직 7회 분량이 남아 있지만 드라마를 집필하는 권순규 작가가 낸 무협소설 에서 결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에서 세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으로 변신한 초립(최재환)이 왕을 도와 군대를 키우고 나라를 일으키는 꿈을 실현해나간다. 이 과정은 청나라를 압도하는 조선의 무예를 펼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 “민족적 울분에 먼저 휩쓸려 통제력을 잃는데, 그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갈 이야기가 종종 애국 신파에 쓸려갈 위기에 빠진다”는 평을 남겼다. 어찌 보면 인간존재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택한 만이 이런 함정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덕성여대 이은애 교수(국문학)는 “대중에게 민족주의야말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 감정이 만들어낸 최대의 거대 담론이 아니던가”라고 물으며 “이 거대 담론은 당분간 역사 드라마의 한 축으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내다본다(‘역사 드라마의 징후적 독해’). 무협사극이라는 장르는 진화하는데 주제의식만은 부단한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양상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땀내 나는 액션을 완성한 이들
<font size="4"><font color="#C21A8D"> “동물적 감각이 따라야 한다”</font> </font>
초절정 무예 고수 뒤엔 이들이 있었다. 의 신궁, 의 무예, 의 검술을 지도한 이들이다. 땀내 나는 액션을 위해 배우들과 몸을 부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영민 접장
대한궁술원을 운영하는 장영민 접장(44)은 올해로 궁술 11년차. 단거리 사격에 능해 15~20m 거리에 있는 것은 토마토든 탁구공이든 다 맞힐 수 있다는 그에게 활은 본능이다. “영화에서와 같은 신궁이 되려면 깊은 수련이 필요하다. 실제 전투할 때 궁사는 본능에 의지해 쏜다. 동물적 감각이 따라야 가능하다.” 그런 신궁이라면 영화 속 남이가 구사하던 곡사도 가능할까? 장 접장은 활이 휘어져 사물 뒤쪽을 맞히는 사법은 불가능하지만, 포물선으로 날아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을 맞힐 것이라고 일러준다. 오랫동안 우리 활터를 지켜온 그는, 영화 속 만주족의 육량전이 파괴력이 더 강할지 모르지만 말을 타고 달리며 쏘기에 적합한 우리 활이 기술적으로는 더 뛰어나다는 자부심도 보였다.
영화를 찍기 전 김한민 감독은 1년6개월을, 박해일은 6개월을 그에게서 배웠다. 특히 활을 쏠 때면 눈에서 광채가 나는 박해일씨에 대한 보람은 남다르다. “박해일씨는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 집중력이나 이해력·응용력이 남달랐다. 처음에는 배우라서 저렇게 적응을 잘하나 했더니, 배우라고 다 그렇지는 않더라. 놀라웠다.”
심새인 안무가
절도 있는 한판 대결이 뜻밖에도 안무가에게서 나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한 심새인(30)씨는 에서 검술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고 싶었단다. 특히 무사 케이가 떠돌이 무사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두 고수는 오랫동안 숨을 멈춘다. 서 있으되 움직이는 것 같고 한 합의 승부이되 백 합의 승부처럼 여겨지는 모습을 위해 공을 들였다. 심씨는 을 맡았을 때 영화 을 떠올렸다. 칼이 목을 느리게 스치는 장면을 현실로 구현하고 싶었다. 의 배우들은 사람을 벨 때 가장 힘을 많이 쓴다고 한다. 심새인씨는 슬로모션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방법을 전수했다. “극의 검술 자세들은 모두 선무도의 자세를 응용했어요. 무사 케이가 가장 어려웠을 거에요. 검객들은 활발히 움직이지만 정작 절대 고수인 케이는 몸을 틀어잡아 버티며 최대한 동작을 절제해요.” 다른 연극이라면 캐릭터를 연구했겠지만 에서 그는 검의 동선을 연구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누군가 칼의 궤도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죽는 거지요. 그때까지는 칼이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요.” 검의 세계는 따로 있었다.
전문식 무술감독
맨주먹에서부터 검술까지. 전문식(44) 무술감독의 무술 세계는 넓다. 영화 로 무술감독을 시작한 그는 , 얼마 전 드라마 까지 찍으며 자동차 스턴트를 무술감독의 긴 이력에 보탰다. 는 그에게 비교적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드라마다. “기교 넘치는 중국 액션을 구사할 만한 인력을 조달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무예에 대해서도 좀더 다채롭게 펼쳐 보이고 싶었어요.” 리얼 액션이 유행해 복잡한 무술이 점점 사라지는 것도 큰 아쉬움이다. “몸만 부딪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 액션 시계는 뒤로 가고 있어요. 몸만 그럴듯하면 무술은 누구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수련도 잘 하지 않지요.” 복잡하고 어려운 기교 액션을 중시하는 그의 스타일은 다른 무술감독과 차별화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인 무술 실력은 어떨까? 그는 합기도 3단에 검도, 태권도 등 여러 무술을 고루 구사한다. “장훈 감독의 를 찍을 때 괜히 남의 일을 거들었다가 영화 속 합을 실전에서 고스란히 다 써먹은 적이 있었죠. 결론은 영화는 영화다, 실전에서는 참아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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