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아버지 사자 무파사는 아들 심바에게 속삭였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렴. 넌 나의 아들이란다. 그리고 진정한 왕이란다.” 그러나 에서 청둥오리 알을 품어 자기 새끼처럼 보호하고 키운 잎싹은 청둥오리 초록이에게 소리친다. “넌 내 아들이야. 종이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 애니메이션이라는 같은 언어로 말하는 두 세계는 이토록 달랐다. 모험과 정복의 애니메이션 생태계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이 다채로운 생명의 색깔을 펴들었다.
날아라, 암탉양계장에서 사는 잎싹(목소리 연기 문소리)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 계속 쏟아지는 모이를 먹고 하루에 한 개씩 알을 낳아야 한다. “나도 알을 품고 싶어”라는 잎싹의 소망은 자유의지와 소통을 향한 소망의 다른 말이다. 잎싹은 양계장을 도망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을 선택한다. 새로 얻은 삶에서 죽음조차 잎싹의 깨달음과 결단의 문제가 된다. 원작자인 황선미 작가는 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잎싹은 하고픈 일을 다 이룬 비참하지 않은 인생이다. 족제비는 살아 있으나 살집 없는 질긴 닭이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 죽음을 쉽게 생각한 게 아니라 삶의 사이클을 이해한 잎싹이라는 존재를 통해 죽음을 가치 있게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종을 가리지 않는 생명에 대한 맹목적 사랑, 본능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비정한 생태계, 게다가 숭고한 체념을 가르치는 애니메이션이라니. 은 이토록 낯선 정서를 설파하며 극장 마당에서 날아올랐다. 8월6일 관객 73만 명 돌파로 한국 애니메이션 부문 최고 기록을 달성한 이래, 지난 8월10일에는 100만 명을 달성하며 거침없이 내달리는 중이다. 마음 졸이던 제작사도 “이 기세라면 200만 명은 넘지 않겠느냐”며 어깨를 폈다. 게다가 국내외 수백억원짜리 블록버스터 극영화가 극장을 선점하고 있던 참이라 이런 기록은 더 뜻깊다. 은 8월 첫째 주말 실제 좌석 점유율에서 53%로 1위를 기록했다. 개봉관 수가 블록버스터에 비해 적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실제 좌석 수에서도 과 에 이어 3위다. 모두가 돈을 대기 꺼리고 대체로 진지하게 평가되지 않던 변방의 장르에 갑자기 시선이 쏠렸다.
순전히 숫자로만 말하면,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미개척지라기보다 사지에 가까웠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집계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현황’ 자료를 보면, 2003년 126억원 제작비를 들인 가 14만 명 동원에 그쳤다. 2007년 가 47만 명을 동원한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2009년과 2010년에는 각각 단 1편씩의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됐을 뿐이었다. 김보연 영화진흥위 정책센터장은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영진위 등 정부 지원을 받아야만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사와 애니메이션 제작업체가 만나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 방식이 옳다. 영화계와 애니메이션은 손잡아야 하고, 정부는 거들어야 한다. 은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분기점 역할을 하는 영화다”라고 평했다.
7년을 기다린 이 개봉하기 한 달 전, 무려 11년의 제작 기간을 거친 도 개봉했다. 은 109개 상영관에서 개봉했다가 ‘3일 천하’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마케팅과 배급에 대한 투자 없이 엄혹한 극장 생태계에서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개봉 한 달이 지나도록 예술영화 전용관을 중심으로 개봉을 이어가고 있다. 제작사가 전국 영화관을 일일이 돌며 개봉을 호소하고, 스태프들은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을 만드는 데 쓰인 작화 원고와 연필을 나눠주고, 감독은 마르고 닳도록 관객과의 대화에 나서는 덕분이다. 완성까지 눈물겨운 공력을 바친 것으로 알려졌던 이 영화는 영화관에 남아 있기 위해서도 필사적인 노력을 다하는 중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애니팀의 박보경 차장은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공력을 보여주는 웰메이드 애니메이션 2편이 쌓아온 제작 역량이 펼쳐질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매출액 이상으로 더 의미 있다. 은 디즈니가 점령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은 청소년·성인용으로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예술영화와도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은 두 갈래 길의 꿈을 꾸고 있다”고 전한다.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양계장을 박차고 나온 두 영화가 부화시킨 창작물은 어떤 빛깔일까.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은 정감이 가는 한국적인 그림체를 만들어냈다. 스펙터클한 극장용 배경 화면에 한국의 산천을 담아냈다. 인물 중심인 디즈니 등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은 자연과 인물의 비율이 훨씬 조화롭게 보인다. 특히 경남 창녕의 우포늪을 그대로 옮긴 자연적 배경 속에서 일본·미국과는 다른 정감을 지닌 그림체를 완성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했다.
은 애니메이션이 담아낼 수 있는 최대치의 꿈을 그린 영화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안재훈 감독은 11년 전 밴드를 하는 여고생들의 성장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을 구상했단다. 그러나 유행에 민감한 밴드로는 기나긴 제작 기간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좀더 우직한 주인공이 필요했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영화에서는 달리기를 하는 여학생 이랑이가 탄생했다. 2등으로 밀려날까봐 넘어져버리던 여학생이 “끝까지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운동화 끈을 조이는 모습은 이 영화의 탄생기를 닮아 있다. 은 어떤 환경에서도 창작자의 진심이 통할 것이라 믿고 앞만 보고 달렸던 긴 달리기이기 때문이다. 10만 장의 작화가 주인공들의 섬세한 표정을 낳았고, 수백 번의 현장 답사가 우리 기억 속에 있는 옛 시공간을 만들어냈다.
픽사와 지브리를 넘는 꿈무제한의 컷과 빛과 손작업과 씨름하는 애니메이션은 창작력의 총화라고 한다. 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빚어내는 것이 창작이다. 선명한 색을 입고 자연을 양껏 호흡하는 의 캐릭터를 보기 전에는 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의 두 주인공인 이랑이와 철수를 보기 전까지는 일본 지브리스튜디오가 창조해낼 수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웃고 뛰어다니는 인물들을 믿지 않았다. 미국 픽사와 지브리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가 세상에 나온 지금,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8월18일에는 한국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32억원 제작비 중 절반을 전남 장성군에서 댄 작품이다. 연상호 감독의 본격 성인 애니메이션 과 한국판 바다 이야기인 이대호 감독의 이 하반기 개봉을 향해 헤엄치고 있다. 이들 중 누가 항구에 다다르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항해다. 황진미씨는 “지금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수출경쟁력만 따지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수준의 담론밖에 없었다. 한 세대가 보는 장르다. 관객과 어떤 호흡을 이뤄나가는지 진지하게 평가할 시기”라고 말했다. 올여름의 경험이 ‘애니메이션 하청기지’를 바꾸게 될까? 마당을 나온 잎싹이라면 “나를 먹으렴. 네 새끼들에게 살찐 젖을 주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랑이라면 “내가 만날 꿈들이 등수가 매겨지는 일들이 아니었으면 한다”고 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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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과 판타지가 교차하는 90분 영화에서 오 감독이 붙든 목표는 한 생명의 각성 과정이었단다. “잎싹이가 처음 청둥오리 알을 품는 장면과 족제비 새끼들을 발견하는 장면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편집했어요. 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려야 잎싹의 최후의 결단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리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 깨달음의 전조를 곳곳에 심으려고 노력했어요.” 을 자산 삼아 그는 생명과 자연을 그려나가는 작업을 계속할 작정이다. 아마도 또 5년이 지나야 마당을 나온 오 감독이 어디로 날아오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공력의 예술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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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전체적인 느낌은 강원도 춘천 정도의 중소도시였으면 했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고향 어디쯤이네 할 수 있도록요. 시대도 20~50대가 옛 기억이 난다고 할 정도였으면 했어요. 어떤 사람은 언제인지 알 거고, 어떤 사람은 찾아다니겠죠. 그럴 때 작품의 문화적 가치가 생길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은 감독이 지닌 기억이기도 하다.
남녀 주인공 자체가 감독이 꿈을 지녔던 시절의 분신이다. 여주인공 이랑이를 더 알고 싶어서 지하철과 텔레비전에서 여학생만 나타나면 유심히 관찰했다. 그 결과 일본 여학생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표정으로 웃고 말하고 달리는 캐릭터가 나왔다.
은 표정과 동작을 섬세하게 관찰한 기록이기도 하다. “지금 작화지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런 것도 신경 썼나 놀랄 때가 있어요. 여학생들이 의자에 한쪽으로 기울여서 걸터앉는 방식이라든가, 하품할 때 새끼손가락을 벌리는 버릇이라든가.” 대신 극적인 소재는 극도로 자제했다.
“사건 속에다 사람들을 억지로 집어넣는 게 두려워서 버린 소재도 있어요. 시대나 정치적 배경이 뚜렷하면 극적인 전개가 쉬워지겠지만 극의 중심도 잃게 되면서 오히려 가벼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자제했지요.”
정성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은 천천히 흘러간다. “TV 시리즈를 할 때 느낀 속도감이 불편했기 때문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관객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며 가고 싶었어요.” 스펙터클 대신 롱테이크가, 전자음악 대신 통기타와 하모니카가 울려퍼지는 세계는 한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이 끈질긴 고집으로 창조해낸 세계다.
“이 다음 작품의 발판이 된다는 말이 싫어서 다음 작품을 안 하고 싶어요. 사람을 대할 때 발판으로 대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11년을 바친 이 작품을 다른 것을 위한 자산으로 삼아야 하나요? 그러다 스태프들이 다음 작품 언제 하느냐고 주저주저 물어올 때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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