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좋아.” 전날 먹은(!) 삼겹살과 소주의 독이 제대로 올라 벌건 얼굴로 꾸역꾸역 마감을 하던 금요일, 느닷없이 전화한 와잎이 “너무 좋아~”를 연발했다. 돋는 소름을 손톱으로 벅벅 긁으며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좋아? 내가?” 와잎의 대답. “뭔 쉰 막걸리 먹고 설사 삐져나오는 소리여~. 아직 술 안 깼냐? 낮술 또 먹었냐?” 휴~ 다행이다. 말인즉슨 동네 아줌마들이랑 문화센터 뒤풀이로 인근 술집을 왔는데 정말 좋다는 거였다. 방처럼 돼 있어서 아늑하고, TV도 있어서 애들 틀어주면 퍼질러 술 먹기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었다. 아이고 참 좋기도 하겠다. 대단한 발견 하셨네요. 아주 퀴리부인 납시었네. 정말 와잎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나저나 ‘웬 아줌마들이 대낮부터 음주야~. 위기의 주부들이구먼’이라고 생각하며 차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와잎 왈. “인생 뭐 있냐. 음주와 대리밖에 없어.” 니가 아주 인생을 통달했구나.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다” 이후 최고의 화두로구나. 벌써 주신을 맞을 접신의 경지에 도달했구먼. 술판 옆에서 보고 춤추고 있을 아들 녀석이 눈에 선했다. 아들아~ 마이 선아~. 엄마를 부탁해~.
주말 내내 그 술집 자랑을 늘어놓던 와잎을 용케 어르고 달래, 그 다음주 수요일 저녁 문제의 그 술집을 찾았다. 와잎과 아들 녀석과 함께.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인테리어는 깨끗하고, 노래방처럼 독립적인 구조는 이색적이었다. “연인끼리 오면 좋겠네”라고 말하자, 와잎이 웃으며 묻는다. “왜 애인이랑 같이 오게?” “내 애인은 자기잖아~”라고 말을 흐리며 속으로 대꾸했다. 장난하냐? 으이구~. 한평생 니 술 접대 하느라 한눈팔 시간도, 돈도 없는 거 모르냐?
자리를 잡자 와잎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아이 먹일 볶음밥과 낙지소면, 그리고 생맥을 주문했다. 와잎의 면밀한 완파(완전 파악)에 경악하고 있는데 한마디 덧붙인다. “오늘 원없이 생맥을 먹어도 되지?” 언젠 원없이 안 먹었니? 도대체 얼마를 먹어야 원없이 먹었다고 할 거니? 인체의 70%가 물이라는데, 넌 80%가 술이지?
낙지소면의 맛은 일반적인 프랜차이즈 술집처럼 표준화돼 있었다. 너무 맵지도 짜지도 않은 맛. 넘치지 않는 균형의 맛이라고 할까. 생맥주는 약간 밍밍했다. 귀신 같은 입맛의 와잎이 한마디 거들었다. “역시 생맥주는 생통 자주 가는 치킨집이 짱이야.” “왜 그럭저럭 괜찮은데.” 집에 생통을 또 달자고 할까봐 난 짐짓 모른 척했다.
TV에서 가 나오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들 녀석은 어깨춤을 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1577~ 1577~.” 와잎은 흐뭇한 얼굴로 지난번 여기 술집을 다녀간 뒤부터 이 노래를 부른다고 덧붙였다. 앞뒤가 아니라, 모자가 똑같은도 아니고. 아주 모전자전이구먼. 음주하는 엄마에 대리 부르는 아들. 눈물겨운 조기교육의 살뜰한 풍경.
문득 난 깨달았다. 그래, 나 혼자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이 음주의 저주를 깰 방법이 없어. 에라 모르겠다. 나도 정신줄을 내려놓고 마시자. 그렇게 와잎과 난 간만에 달리고 달렸다. 아들 녀석은 옆에서 노래를 부르며 경주하는 애비·에미를 응원했다.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1577~1577~. 앞뒤가 똑같은 번호로 대리운전을 불러 집에 가는 길에도 아들 녀석의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아들아, 내가 니 애비, 얘가 니 에미다. 문의 02-599-4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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